우리가 마주한 거대한 장벽을 넘기 위해
22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개혁진보 선거연합'이 등장했습니다. 사회운동의 일부가 신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연합하는 광경을 마주하며 사회운동의 일원을 자처하는 우리는 참담한 분노를 느낍니다. 이윤 축적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사회적 힘과 정치적 전망을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만들어가야 합니다.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조직위원회'는 이러한 취지의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를 알리고, 더욱 많은 활동가들이 함께 하기를 기대하며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네 편의 글을 싣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속절 없이 심란해진다. 저마다 심란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나에게는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 우선, '개인 시민'인 나의 위치가 정치판에서 외면하는 집단이라는 점이 첫 번째다. 청년, 여성, 페미니스트. 모두가 알고있다시피 현 정부는 청년 여성을 '없는 존재' 취급하는 데에 도가 텄다. 20대 여성은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소수정당·무소속 후보에게 15.1%나 투표하는 등, 가장 진보적인 집단으로 여지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청년 여성을 적극적으로 외면하거나, 위기의 국면에 표심을 얻을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응답도 하지 않고 있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현실 속에, 이들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다. 나 역시 투표소에 들어갈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 역시 나를 대변할 후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유권자 대비 전체 예비후보자 비율을 따졌을 때 20대 여성 유권자 296만 명 중 20대 여성 예비후보자는 단 다섯 명(0.3%), 30대 여성 유권자 315만 명 중 30대 여성 예비후보자는 15명(1%).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50대 남성(34.8%), 60대 남성(32.4%)에 비교하면 참 비루한 수치다. 정치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얼굴들을 떠올려보면 새롭지도 않은 사실이지만 새삼스럽게 화가 난다. 이쯤 되면 국회에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며 자진 사퇴할 때도 되었는데, 당연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발 딛고 선 운동에서 출발한다. 성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는 동안, 피해생존자가 자신이 경험한 성폭력을 재해석하고 세상에 외칠 때 공고하게 보였던 한국 사회의 상식이 여지없이 뒤집어지는 광경을 여러 번 봐왔다. 미투운동에서 드러났듯, 피해생존자들의 말하기는 남성을 기준으로 세워진 공고한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내고 말 그대로 세상을 '뒤엎었다'. 안희정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용감한 고발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정치권 내의 제왕적 문화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소위 '페미니즘'을 표방했던 남성 정치인이 숨겨온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업계와 분야를 막론하고 터져나온 피해생존자들의 경험에서 발견한 중요한 통찰, 즉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성차별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1991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성폭력은 근본적으로 성차별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다는 점이다. 성차별이라는 개념어가 성폭력과 붙는 건 어딘지 어색하다고? '성별분업', '성역할'이 바로 성차별의 다른 이름이다. 성폭력을 해결하려면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성차별을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를 비롯한 그간의 정치는 폭력을 관리하는 데에만 그칠 뿐, 성차별을 적극적으로 해소할 노력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성차별이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근간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육아를 여성의 역할로 떠넘겨 경력단절 현상을 방치하고, 이들이 다시 노동시장으로 진입할 때 누구나 대체 가능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 일자리의 대부분 '돌봄'과 관련되어있거나, 저임금·고강도인 경우가 많다. 인구 재생산이 있어야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저출생 문제의 해결책은 단기적인 현금성 지원책이 아니라 성별분업 해체, 노동시간 단축, 돌봄의 여성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2024년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미우나 고우나 성평등 정책을 실현할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왔던 여성가족부 장관은 공석인 채, 점점 0%에 가까워지는 출생율을 '이기적인 젊은 여자 탓'이나 하며 허송세월로 보내고 있다.
그래서 상담소는 성폭력과 관련 없어 보이는 활동에도 연대한다. 더 이상 차별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차별금지법 제정을 기원하며 농성장에서 꼬박 밤을 새며 국회 앞을 지켰다. 부설 쉼터에 주로 입소하는 여성/청소년이 언젠가 떠나야하는 불안정한 주거공간을 맴돌지 않고 자신만의 규칙과 취향을 채울 수 있는 안정적인 집을 만날 수 있도록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에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장애인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세상은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이들에게도 자유로운 세상일 것이기에, 누구나 어디든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서울 지하철 역사를 비롯한 이동권 투쟁의 현장에 달려가기도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문재인 대통령 후보에게 "여성이자 동성애자인 나의 인권을 반으로 가를 수 있느냐?"는 물음을 던졌던 어느 활동가의 말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 말대로다. 사람의 정체성은 아주 잘게 쪼개어 약한 고리만 쏙쏙 골라내 갈아끼울 수 있는 이름표가 아니다. 해방은 개인의 약자성만 골라 제거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작년 9월 대법원 판례를 통해 강제추행의 유·무죄를 판단할 때 피해자가 저항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수준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피해자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협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에 포섭되지 못했던 수많은 성폭력 사건을 떠올릴 때,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 진보는 폭행·협박이 성폭력의 구성요건이라는 법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는 한계도 내포하고 있다. 여전히 수많은 피해자들은 국가의 규범에서 미끄러진 채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개별 운동이 만들어내는 진전이 모두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 운동에서 개별적으로 이뤄내는 진전 이외에, 홀로는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는 기득권 중심의 규칙과 상식을 모조리 뒤엎는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혹은 반성폭력 운동이 홀로 해낼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그어진 운동의 구획을 적극적으로 넘어서서 99%를 가난하게 만드는 1%만을 위한 체제를 거부하는 것, 1번이나 2번이나 별다르지 않게 보이는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들만의 '정권 교체'가 아니라 99%만의 새로운 상식을 만들자는 것. 성폭력 2차가해자들이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으로 재생산되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체제전환을 해보자는 것이다.
"같이 체제전환 해볼래요?" 라고 말할 때마다,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체제전환이 뭔데?" 라는 질문을 받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나 혼자서는 잘 그려지지 않으니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간 접점이 없던 우리가 만나 서로를 알아간다면, 서로가 그리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공동의 전망을 조금씩 그리다 보면 "체제전환이 바로 이런 거야!"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함께 이야기를 나눌 동료들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내가 마주한 두터운 장벽을 뚫기 위해 먼저 부딪쳐본 사람, 기발한 아이디어로 다양한 시도를 해본 사람, 장벽의 원인과 분석을 깊게 고민해본 사람, 심지어는 고민하는 것도 너무 피곤해져서 집에서 누워만 있었던 사람까지. 정치대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이야기를 모으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마주한 곤경을 뚫고 나갈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바로가기
[닻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humanrights@sarangb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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