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香’ 퍼트리기로 인생3막… “한국미술 해외 인정받게 힘쓸 터”[요즘 어떻게]

장재선 기자 2024. 3. 2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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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어떻게 - 신문선 명지대 초빙교수
축구해설가·교수·갤러리스트
홍대 술집 많은게 싫어 화랑 내
자택 개조해 예술 공간도 마련
“한국작가 작품성 뛰어나지만
K- 팝처럼 크게 인정 못받아
어렵게 구한 작품 모두에 사연
자다가 일어나서 보고 웃죠”
신문선 와우갤러리 명예관장이 박영선 작가의 조각과 포즈를 취했다. 그는 “1990년대에 이걸 샀을 때, 아내가 값을 물어와 0자 하나 떼고 말했다”며 “넉넉하지 않음에도 작품 수집을 허락해준 아내에게 늘 고맙다”고 했다. 박윤슬 기자

“내일 오후 ‘신문선 공간’으로 오셔서 따뜻한 차 함께 하시죠.”

축구해설가인 신문선(66) 명지대 초빙교수는 이런 문자로 방문을 허락했다. 최근 찾아간 서울 상수동 ‘신문선 공간’은 그의 안내대로 축대가 높고 정원에 소나무가 있는 집이었다. 그의 가족이 4년 전 청운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18년 동안 살았던 자택을 개조한 곳이다. 그는 지하 1층, 지상 3층의 이 집을 매입할 때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일본민예관(日本民芸館)과 같은 예술 공간으로 꾸미겠다는 꿈을 은연중 품었다고 했다.

그가 서울 홍익대 인근에 갤러리를 열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와우갤러리 명예관장’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에 관해 쓴 글도 봤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과거 축구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서 축구 해설가로 활약했다. ‘골, 골, 골이에요 ~골~’이라는 외침이 유행어가 될 만큼 독특한 말투와 재치있는 언변으로 인기를 누렸다. 축구인으로 살던 그가 명지대 스포츠 기록정보대학원 교수로 17년간(2007∼2023) 재직했던 시기를 인생 2막이라고 한다면, 그는 이제 제3막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미술대학이 있는 홍익대 근처에 술집들만 많은 게 보기 싫어서 거기에 화랑을 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예술의 향기를 우리 사회에 퍼트리는 게 그의 포부이다. 한국 미술 작가들이 해외에서 더 인정받도록 하는 데 역할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한국 미술은 현재 해외에서 1970년대 한국 축구 수준의 대접을 받습니다. K-팝 등 대중문화가 크게 인정받는 것과는 큰 격차가 있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작가 중 해외 유명 아티스트 못지않게 작품성이 뛰어난 분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도록 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신문선 공간’에 자리한 지순택 作 달항아리.

그는 ‘신문선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미술 작품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했다. “여기 권순철 선생이 그린 ‘얼굴’ 작품이 많은데, 한국 현대사의 고난을 담고 있습니다. 6·25 전쟁 때 남편이 실종된 후 혼자서 세 자녀를 키웠던 어머니의 삶에 대한 애정이 바탕에 깔려있지요. 저희 와우갤러리 개관전에 함께 했던 권영범 작가의 꽃 그림은 병으로 생사기로에 있는 딸을 위하는 심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변시지 화백 작품들에선 고향 제주의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지요.”

작품 한 점마다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은 축구를 좋아했던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든지, 군중(群衆)을 그린 이상원 화백 작품은 작가가 소장하겠다는 것을 읍소해서 가져왔다든지….

그의 공간엔 50여 년이 넘는 지순택 작가의 달항아리 등 도자 작품도 꽤 있다. 운동선수였던 그가 예술에 눈을 뜨게 된 것과 관련이 있는 작품들이다.

“연세대 축구 선수로 자매 학교인 일본 게이오대 원정 경기를 갔을 때, 일본 친구 집에 갔다가 놀랐습니다. 반닫이 등 다양한 고가구로 꾸며진 집에 달항아리가 조화를 이루며 기품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큰 자극을 받아서 앞으로 내 예술 공간을 갖겠다고 마음먹고,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지요.”

그는 축구 해설위원으로 중계방송을 위해 해외에 나갈 때마다 박물관, 미술관을 다녔다. 국내 전시도 숱하게 찾았다. “술, 담배와 잡기를 하지 않는 대신에 미술관 순례와 작품 매입에 힘썼어요. 작품 소장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보고 웃어요.”

그는 미술 이야기를 하다가 거실에 자리한 빈티지 오디오로 음악을 들려주고, 다탁(茶卓)에서 보이차를 연신 권했다. “인간은 나무와 같아서 음악, 차를 통해 물을 줘야 시들지 않습니다.” 그는 특유의 달변으로 오디오 시스템과 음악, 그리고 차에 대한 이야기를 펼쳤는데, 나중에 별도 지면에 다루고 싶을 만큼 흥미로웠다.

예술을 통해 제3막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는 역시 축구인이었다. “아시안게임 때 선배들과 몸싸움을 벌여 비난을 받은 이강인 선수를 이제 너그럽게 봐 줬으면 합니다. 이강인은 어렸을 때부터 유럽에 가서 살아남기 위해 괴팍한 개성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그런 선수를 받아들여서 자율성, 창의성으로 조화시켜야 레벨업 될 수 있습니다. 이 기회에 말씀드리면, 축구대표팀 사령탑으로 외국 지도자만 우대하지 말고 한국 지도자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미술 작가들 수준이 세계적이듯 우리 축구 지도자들도 그 단계에 와 있습니다.”

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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