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주, 장진숙, 임태훈…민주당의 자가당착 [홍성수 칼럼]
홍성수 |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 중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만한 법안 두개가 있다. 하나는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2건)이고 다른 하나는 차별금지 법안(4건)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이 구시대의 유물을 청산한다는 의미가 있다면, 차별금지 법안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와 진전을 가늠하게 해주는 잣대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시민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의원실을 찾아다니며 법안 통과를 위해 전력을 다했던 이유다. 촛불혁명의 산물인 문재인 정권과 민주화의 적통을 자처하는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 다수인 국회.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조건이었지만, 이 두 법안은 곧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될 운명에 처해 있다. 총선 후 남은 임기 동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20년이 넘은 해묵은 과제인데, 또 다음 국회를 기다려야 하는 허탈한 상황이다. 그런데 공천 과정에서 탈락한 의원들의 면면을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차별금지 법안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 발의에 동참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유난히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경선 결과를 정리해봤더니 예상대로다. 차별금지 법안에 서명한 의원 37명 중 민주당 의원은 30명이었다. 이 중 22대 총선 출마가 확정된 의원은 10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불출마, 경선 탈락, 당적 변경 등 각기 다른 사정으로 출마가 무산되었다. 전체 현역 의원 탈락률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수치다. 열정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뛰었던 권인숙 의원의 경선 탈락과 대표발의자로 24명의 공동 발의 의원을 모으는 리더십을 발휘했던 이상민 의원의 당적 이탈이 뼈아프다.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에 서명한 의원은 30명으로, 민주당 의원이 23명이었다. 이 중 총선에 출마하는 의원은 겨우 6명이다. 두 법안의 공동 발의에 동참했던 의원 중 상당수가 출마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새롭게 공천을 받은 후보자 중 기대를 걸어볼 만한 인물이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라면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터졌다. 2018년 차별금지법을 다룬 한국방송(KBS) ‘생방송 심야토론’에 반대쪽 패널로 출연했던 이언주 전 의원(당시 바른미래당)은 윤석열 대통령을 매섭게 비판한다는 이유로 당 대표의 권유를 받아 민주당에 입당했고, ‘여전사’로 불리며 출마가 확정되었다. 더불어민주연합에서는 진보당 장진숙 비례대표 후보를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주도했던 정당에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 국회의원이 될 수 없는 사유가 된 것이다. 당 소속 의원 중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인물들이 한둘이 아닌데, 이들은 아무 문제 없이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했던 임태훈 후보를 ‘병역기피자’로 몰아 탈락시킨 일이다. 민주당은 대체복무제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고, 관련 법안 통과를 주도했던 정당이었다. 실제로는 임 후보가 성소수자라는 점이 문제였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성소수자라서 배제되었다면 명백한 차별이고, 그 이유를 숨기기 위해 ‘병역기피’를 내세웠다고 해도 문제는 매한가지다. 이 모든 결정이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최고위원회와 공천관리위원회 등 공식적이고 집단적인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실로 충격적이다.
이 절망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국민의힘보다는 민주당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있다. 느리고 답답하긴 해도 최소한 퇴행적이지는 않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열망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해온 정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최소한의 기대조차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21대 국회에서는 국민들이 만들어준 절호의 기회를 저버리고 국가보안법 폐지와 차별금지법 제정이 사실상 무산되었고, 공천 결과만 놓고 보자면 22대 국회에 기대를 걸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래도 민주당이 낫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조금씩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천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친명’이냐 ‘반명’이냐의 문제였지만, 실은 더 중대한 질문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은 과연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향하는 정당인가?’ 다행히 총선은 아직 한달이나 남았고 여전히 기회는 있다. 공천에 대한 실망이 정책에 대한 기대로 바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한국 정치에서 한달은 천지개벽도 일어날 수 있는 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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