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글로벌 기업은 大경쟁 중인데… 대기업집단 정책, 우리도 바꿀 때다

신현윤 연세대 명예교수, 한국경쟁포럼 회장 2024. 3.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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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이후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우리나라 대외 경제 여건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미래 산업을 주도할 IT·AI 기술 패권을 둘러싼 빅테크 기업의 대규모 집중 투자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도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수출에 의존해야 하는 우리 경제의 앞날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반도체, 자동차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 선두를 달리는 우리 대기업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크다.

하지만 정작 그동안 대기업집단 정책은 공정한 경쟁이나 거래 질서보다 ‘국내시장’에서의 경제력 집중 억제를 최우선 목표로 추진되어왔다. 이는 과거 재벌에 대한 각종 특혜와 지원, 정경 유착에 대한 국민 정서적 반감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도 하다. 그 근저에는 우리나라의 경제력 집중도가 외국에 비해 우려할 만큼 높은 수준에 있으며, 경제력 집중이 사회적 해악이라는 믿음도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에서 이처럼 세계적 수준의 대기업이 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우리나라 특유의 대기업집단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경제력 집중도에 관한 한, 지난 10년간 OECD의 국가별 100대 기업의 자산 집중도나 매출 집중도를 비교하면 19국 중 15위로 경제력 집중이 우리나라 고유의 문제로만 보기 어렵다. 글로벌 대기업 가운데 GDP 대비 자산 총액이 우리나라의 대기업집단보다 높은 경우도 있으나, 경제력 집중을 이유로 규제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실증되지 아니한 경쟁 제한 효과’나 ‘추상적 위법성 판단 기준’을 근거로 규제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대기업집단 정책은 경제력 집중 억제라는 목표 하나를 염두에 두고 추진돼 왔다. 자산 규모가 일정한 기준에 달하면 모두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현재 82개 대기업집단, 3076개 계열 회사)해 각종 의무와 책임을 부과하는 방식을 유지해오고 있다. 매년 그 수도 증가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는 순간, 공정거래법을 원용하는 41개 다른 법률의 적용 대상으로 되어 ‘규제의 늪’에 빠지게 되는 점이다. 특히 대기업집단의 유형과 특성을 구분하지 않고 규제를 일반화함으로써 혁신과 공정 경쟁을 통해 규모를 키워온 신흥 대기업집단조차 ‘승자필벌(勝者必罰)’이라는 모순된 결과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규제의 일반화도 문제지만, 규제의 편익을 이유로 친·인척의 모든 지분 소유 관계를 일일이 조사하여 공시하고 보고토록 하는 것은 규제 대상인 대기업집단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룹 경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친·인척의 지분 소유를 근거로 공정거래법상의 각종 의무와 책임을 부담 지우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식의 규제는 자신의 행위가 아닌 다른 사람의 행위로 인하여 책임이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기책임의 원칙’(헌법 제10조)과 부합하기 어렵다. 나아가 오늘날 친족 관계와 관련한 불이익한 처우를 일반적으로 금지하는 ‘연좌제 금지’(헌법 제13조 제3항)를 위반할 소지도 있다.

지금은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고, 거대 글로벌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대경쟁(mega competition)을 벌여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40년간 국내시장에서의 경제력 집중 억제를 염두에 두고 추진됐던 대기업집단 정책이 여전히 유효한 규제 체계로 작동할 수 있는지 이제 되돌아보아야 한다. 과거 재벌에 대한 편향된 부정 의식이 고착화되어 경제력 집중 자체를 선과 악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국내시장에서의 경제력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규제하는 것이 세계시장에서 경쟁을 감당해야 할 국내 대기업에 대한 역차별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차분히 되살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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