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임자 마들렌, 수정과 라테… NYT “예술로서의 디저트”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 2024. 3. 2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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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배의 ‘뉴욕의 한인 셰프’] [8] ’리제(Lysée)’의 이은지 셰프
이은지 셰프가 자신이 운영하는 제과점 ‘리제(Lysée)’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리제(Lysée)’ 제공

뉴욕의 빵과 케이크는 대체적으로 맛이 없다. 간혹 유명한 한두 개의 제과점, 또는 고급 레스토랑의 디저트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그 수준은 파리나 빈, 서울이나 도쿄에 비해서 떨어진다. 그나마 ‘크로넛(Cronut)’ 돌풍을 일으킨 도미니크 안셀(Dominique Ansel)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뉴욕의 가장 핫한 제과점은 ‘리제(Lysée)’. 한인 셰프 이은지(36)가 주인이다. 플랫아이언 지역에 2022년 오픈하자마자 두 시간씩 줄 서는 풍경을 만들고, 다음 해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북 ‘라 리스트(La liste)’에서 올해의 제과상을 받은 곳이다.

이은지 셰프는 중학교 시절, TV에서 우연히 접한 제과의 세계에 반해서 페이스트리 셰프가 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은 대학 진학을 원했으나 10년 계획을 빼곡히 적어놓은 어린 딸의 노트를 우연히 보고 감동해 도와주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결심은 곧바로 제과의 본고장 프랑스로의 유학으로 이어졌다. 노르망디 루엔(Rouen)에 있는 국립제과제빵학교 INBP(Institut National de la Boulangerie Pâtisserie)에 입학하여 제빵을 배우고, 졸업 후 알자스 지방의 베이커리에서 근무했다. 이후 파리 최고의 페이스트리 학교인 에콜 페란디(École Ferrandi)에 다시 진학, 제과를 전공해 국가자격증을 취득했다.

졸업 후 미쉐린 3스타인 ‘르 뫼리스(Le Meurice)’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었다. 주방의 셰프가 50명, 페이스트리 셰프만 별도로 20명이 상주하는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다. 군기가 세고 괴롭힘도 자주 일어나는 곳이 주방이지만, 동료들은 이 셰프의 열정과 노력에 감탄, 허브나 야채 등 주방의 식재료를 마음껏 쓰면서 디저트를 개발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4년간 근무하며 ‘셰프 드 파티(Chef de Partie)’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당시 페이스트리 총괄 셰프는 잘 알려진 세드릭(Cedric Grolet)이었다. 그는 르 뫼리스에서 나와 2016년 독립할 때 이 셰프에게 매장의 총괄 셰프 자리를 제안했지만 이 셰프는 고사했다. 뉴욕의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정식’에 페이스트리 셰프로 초청을 받아 새로운 무대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인기 메뉴 ‘옥수수(Corn)’. 실제 옥수수처럼 생긴 이 디저트는 일 100개 한정 제품, 매일 매진이다. /‘리제(Lysée)’ 제공

‘정식’에 근무하는 5년간 이 셰프는 착실하게 독립 제과점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를 했다. 역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으며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도 회자되는 ‘껍질째 먹는 바나나’ 디저트다. 마트에 진열된 작은 바나나에서 영감을 얻어 디저트를 바나나 실물처럼 만들고, 과일 바구니에 담아서 제공, 손님이 직접 접시에 옮겨가는 프레젠테이션이다. 이 바나나는 ‘리제’의 인기 메뉴 ‘옥수수(Corn)’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매체가 하나같이 언급한 상품이다. 개점 첫해 1만 개 이상이 팔렸고, 지금도 하루 생산량 100개가 늘 매진되는 상품이다. 회화의 착시 기법인 ‘트롱프 뢰유(Trompe-l’oeil)’를 사용, 실제 옥수수 같기도, 또 한편으로는 이모티콘의 옥수수 같기도 한 형태다. 손님들은 한결같이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먹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평범한 것을 싫어하는 이은지는 늘 창작을 한다. 제과는 예술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그래서 다른 데서 본 적 없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또 노력한다. 예를 들어서 보통 수평으로 쌓고 위에서 누르면서 여러 켜를 만드는 밀푀유(mille-feuille)를 세로로 쌓아서 부풀림으로써 켜 사이의 공간을 확보, 공기가 주입되면서 식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 셰프의 밀푀유를 깨물면 바삭한 조각들이 “행복한 향과 맛”을 풍기며 입천장에 떠다닌다. 밀푀유는 새로운 게 아니지만 이런 밀푀유는 뉴요커들에게 처음이다.

리제의 다양한 디저트 제품. 사진 속 왼쪽 아래가 대표 상품인 리제 케이크다. 기와의 수막새 모양을 본따 만들었다. 이 셰프는 대추, 흑임자, 수정과 등 한국적 재료를 이용해 디저트를 만든다. /‘리제(Lysée)’ 제공

이 셰프의 제과가 독특한 점은 ‘한국’을 표현하는 것이다. 볶은 메밀, 대추크림, 현미무스 등 다양한 한국적 재료를 이용한다. 흑임자 마들렌이나 참기름 간장 쿠키, 수정과 라테 등도 있다. 이 모두가 창작품이다. 하루 100개가 팔리는, 매장의 이름과 동일한 대표 상품 ‘리제’는 기와의 수막새 모양을 응용했다. 모티브는 공간으로도 연결된다. 여러 매체에서 ‘제과 부티크’, ‘제과 갤러리’라고 부른 것처럼, 보석점이나 미술관처럼 보이는 ‘리제’의 인테리어는 모던하지만 한국의 미가 담겨져 있다. 자개를 이용한 벽면, 한옥과 같이 노출된 기둥, 그리고 계절 꽃나무를 담은 달항아리 등의 요소가 은은하면서 아름답다.

제과는 섬세하고 민감한 음식이다. 첫입을 깨물었을 때 ‘와!’ 하고 감탄이 나와야 한다. 그 순간의 식감과 풍미가 모든 걸 결정한다. 그걸 치밀하게 계산해서 재료의 조합과 공정의 순서, 굽는 온도와 시간을 정해야 한다. 고도의 집중과 수백 번의 시행착오가 요구되는 작업이다.

뉴욕타임스는 2023년 1월 “한국의 페이스트리 셰프가 예술로서의 디저트를 정의하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서 ‘리제’를 상세하게 소개했다. 근래에 이 셰프는 루이비통이나 서울의 특급호텔 행사, 권위 있는 국제 제과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으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이어지는 러브콜이다. 이은지는 뉴욕에 오면 꼭 방문해야 할 곳, 그리고 뉴욕을 넘어서 세계적인 제과점으로 우뚝 설 수 있을 때까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제과를 계속 만들 거라고 한다. 한국이라는 배경, 프랑스에서의 경험, 그리고 뉴욕이라는 무대로 이어지는 그녀의 퍼포먼스는 오늘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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