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차갑게 생각하고 뜨겁게 살라!

2024. 3. 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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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어마어마한 에너지장인 우주는 양자 역학의 원리가 작동하는 가운데 제 질서를 유지한다. 수천억 개의 별들, 은하계, 성운, 암흑물질 같은 실재들은 광대한 우주 안에서 상호 영향을 미치며 공존하는 것이다. 이 중 지구는 창백한 빛을 내는 아주 작은 점이다. 이 사랑스러운 녹색별은 우리은하 소속 오리온자리 나선팔에 있는 태양계의 제3행성 자리를 차지한다. 이 지구에서 원핵 생명체에서 수백만 년에 걸친 오랜 진화 끝에 영리한 생명체로 빚어진 게 오늘의 우리다. 사람들은 이 지구에 와서 살고 사랑하다가 덧없이 사라진다.

 가장 사람다운 것은 무엇일까

사람은 지구에서 착한 사람들과 사랑하고 협력하며 산다. 우리 중 일부는 골골송을 부르는 고양이와 한 침대에서 잠들고, 오후의 카페에서 진지한 사업을 구상하며, 환절기에는 계절성 우울증을 앓는다. 난민후원단체에 작은 기금을 보내며, 보이스피싱의 덫에 걸려 돈을 잃기도 한다. 출퇴근길 전동차는 만원이고, 병원 영안실은 문상객으로 넘친다.

이토록 분주한 세계에서 가장 사람다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함이다. 생각함은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 자료를 입력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뇌에서 정보처리를 하는 과정을 아우른다. 사람은 먹고사는 것을 넘어서서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찾느라 시간을 보낸다. 사람은 지구 생명체 중 유일하게 의미를 찾는 존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퍼뜨린 유명한 철학적 명제인데,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의미의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이 명제는 참이다.

한때 선사들의 일화를 열심히 찾아 읽었던 때가 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는 뜻을 가진 마전성경(磨成鏡)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남종선의 조사 중 하나인 마조 도일은 육조 혜능 아래서 수행한 남악 회양의 제자로 보통은 마조라고 불렸다. 회양은 마조에게 “소를 수레에 매서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라고 물었던 선사다.

 외아들 잃은 과부의 늦은 깨침

회양은 좌선에 깊이 빠진 마조에게 물었다. “수좌는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고?”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얼마 뒤 회양 선사는 벽돌을 구해 암자에 와서 갈기 시작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조가 스승에게 조심스럽게 여쭸다.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고자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할진대,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벽돌을 천 년 동안 갈아도 거울을 만들 수는 없다. 그 찰나 마조는 벼락이 내리꽂히듯 한 소식을 듣는다.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는 이들이 도처에 나타나는데, 대개는 가짜다. 중생은 그 가짜들을 쫓다가 제 아까운 인생만 낭비한다. 부처, 예수, 마호메트, 공자, 혜능 선사, 마더 테레사, 오쇼 라즈니시, 차라투스트라(니체의 분신!) 같은 이들이 깨달음을 전한다. 이들에겐 반드시 추종자들이 생긴다. 추종자란 인생에 해답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한 줌의 깨달음조차 없이 살 때 삶은 영원한 수수께끼고, 인간은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깨달음이나 해답 같은 건 없다. 우리는 타고난 대로 살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제 처지에서 최악의 길을 피하느라 고심하고, 심장을 뛰게 하며, 제 모든 것을 다 바쳐 이룰 그 무언가를 찾느라 애쓸 뿐이다.

과연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저마다 인생의 의미를 두고 사는 게 하나쯤은 있을 테다. 아마도 그것은 생사와 관련된 궁극의 물음일 테다. “왜 죽음은 내 존재를 가득 채우며 고동치고/내 일생을 몇 초(秒)의 날갯짓에 묶어 두는가?”(아도니스, ‘산고(産苦)’) 인생은 고해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요, 태어나 죽는 것도 고통이다. 사람은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 생을 사는 것이다.

한 과부가 외아들이 죽자 부처를 찾아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매달린다. 부처는 어미에게 “네가 사는 성에 가서 사람이 죽어 나오지 않는 집을 찾아라. 그 집에서 얻은 쌀로 떡을 해오면 내가 그 떡을 먹고 네 아들을 살려주마”라고 했다. 어미는 사람이 죽어 나오지 않는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부처는 돌아온 어미에게 말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라고!

 봄날 아침 작약꽃을 바라본다

누가 죽음을 회피할 수 있을까? 아무도 그럴 수 없다. 사람은 본디 태어나고 죽는 존재인 것을! 부처도, 예수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다 죽는다. 죽음은 우리를 속박하고 불안에 얽어맨다. 사람은 죽음이 만드는 불안에 사로잡혀 뇌가 졸아드는 두려움 속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죽음이란 장벽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은가! 죽음은 궁극의 무로 회귀하는 것이고, 삶을 완성하는 계기이자 영원한 휴식일 테다. 사람은 먼지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작은 존재다. 먼지는 극한소로 분해된 형태의 물질이다. 우리는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입자로 공중에 떠돌다가 무로 돌아간다.

비가 내리는 새벽이다. 땅속 구근들은 싹을 틔우기 위해 꿈틀거리고, 모란과 작약의 꽃망울은 둥글게 부푼다. 이 순간 나는 살아있고, 당연히 심장이 뛰고 있다. 살아있기에 비 내리는 새벽 차가운 머리로 생각에 빠져든다. 이 순간 내게 갈급한 것은 인생의 깨달음이 아니라 뜨거운 커피 한 잔뿐이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가? 나는 단 한 번도 분별을 넘어서거나 영적 희열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나는 비록 아무 해답도 얻지 못한 채 방황하지만 빗속을 걷고 봄날 아침 작약꽃을 말없이 바라본 적은 있다. 오, 시인은 노래한다. “살아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김경미, ‘취급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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