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세상을 잇고, 추억을 품다] 4. 정선공용버스터미널

유주현 2024. 3. 2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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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은 버스를 타고, 버스는 배를 타고… 삶을 관통하다
과거 정선 제일 관문 마전치
낭떠러지 아찔 일명 ‘비행기재’
비포장 도로에 험난한 버스길
강릉행 버스 찻배에 태우기도
봉양리 옛 터미널 매표 업무만
근처 우시장·5일장 열려 혼잡
1984년 북실리 터미널 신축
올림픽 이후 교통망 대폭 개선
작품 전시·공연·독서공간 등
문화향기 가득한 장소로 변신
1982년 정선 비행기재 도로

‘울고 왔다 울고 간다’는 정선 땅. 옛날 정선으로 부임하는 군수와 기관장들은 두메산골로 들어간다는 서러움에 울면서 왔다고 한다. 그러나 정선에 눌러앉아 살다보니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이 좋아 다른 어느 지역보다 정이 들어 임기를 마치고 막상 떠날 때는 가기 싫어 또 한 번 울면서 정선 땅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이 이야기와 함께 비행기재의 험준한 도로를 버스로 오가면서 울고 왔다 울고 갔다는 속설도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예전의 정선은 오지였다. 버스는 정선 지역주민들에게 있어서 삶의 한 부분이었고, 대중교통터미널은 생활 터전이기도 했다.

-아날로그적인 삶의 시대

정선의 대표적인 관문은 마전치(麻田峙)다. 일명 비행기재라고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초인 1913년 1월 정선읍 광하리 망하에서 평창군 미탄면을 경유하는 정선~평창 구간의 도로가 3등 도로로 정해지면서 정선 제일 관문이 됐다. 광하리 망하에서 평창 미탄면을 잇는 8.3㎞ 아흔아홉 구비의 고갯길로,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이곳으로 완행 버스가 하루 한번 운행했다. 비행기재로 불린 이유는 도로 바로 옆이 낭떠러지인 험준한 도로라, 자동차를 타고 가다보면 마치 비행기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것 같다고 해서 생겨났다. 1988년 비행기재 터널이 개통되기 전 망하에서 미탄면 미탄리를 잇는 비행기재 도로를 다니던 버스가 벼랑을 아슬아슬하게 곡예하듯 가다보니 승객들은 도착지에 이를 때까지 마음을 졸여야 했으며,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사고도 잦았다. 정선읍에서 버스를 타고 여량면, 임계면을 거쳐 강릉 등으로 가기 위해서는 비포장 도로와 함께 중간중간 찻배를 이용해야만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도착시간은 종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로 인한 지역주민들의 삶 또한 디지털적인 삶 보단 아날로그적인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

버스를 배에 싣고 강을 건넜던 1974년 정선군 여량면 도선장 모습. 사진제공=정선군청

-주민들의 삶의 여정 그대로 투영

정선공용버스터미널은 현재 정선읍 북실리에 위치해 있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봉양리에 있었다. 터미널은 현 정선고 들어가는 곳에 있었다. 당시 터미널은 차표를 파는 매표소 역할만 했다. 이근식(80) 대한노인회 정선군지회장은 “당시 매표소를 운영했던 분은 삐쩍 마르고 꼬장꼬장 하셨던 분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터미널 앞에는 펑크 수리와 자동차 수리를 하는 ‘육운사’라는 정비소가 있었는데, 당시 육운사를 운영했던 분이 대한노인회 정선군지회 1~6대 회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이후 작고하신 이무현 씨 부친께서 조선일보 신문보급소를 하면서 터미널도 같이 운영했는데, 당시 검표했던 분이 아주 독했다고 회상했다.

이 지회장은 “그 당시 어르신들은 집에서 농사 진 농산물을 팔기위해, 팔고 난 후 다른 농산물을 구입 등으로 버스에 짐을 한가득 싣고 왔다갔다 했던 시절이었는데 차장은 어르신들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고 막무가내로 성을 내는 등 엄청난 갑질(?)을 했다”고 술회했다.

이후 버스터미널은 1965~1968년 사이에 현 동호장 모텔 인근으로 이전했다. 터미널, 즉 매표소를 운영했던 분은 권오삼 씨로, 쌍둥이 형제였다. 당시 버스 검표원은 예쁜 여자가 타면 차비를 받지도 않았고, 좌석도 직접 배치해 주는 등 대단한 위세(?)를 과시했다. 터미널 주변에는 우시장과 함께 도로변에 5일장이 서는 등 매우 혼잡했다. 또한 정선아리랑제도 이곳 터미널 주변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터미널은 오늘날 전국 최고의 5일장과 글로벌 K-아리랑의 서곡을 열게 하는데 한몫했다.

정선읍 봉양리 구 버스터미널 부근에 섰던 정선시장의 풍경.1980년대 초로 추정. 

-디지털적인 삶·문화 시대 활짝

1970년대 초 정선읍에서 춘천까지 가는데 이틀정도 소요됐다고 한다. 당시 군청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이근식 군 노인회장은 강원도청으로 업무협의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려면 직행 버스가 없어 비포장 도로를 이용해 영월을 거쳐 제천가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춘천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비포장 도로, 험난한 산세를 돌고 돌아 만들어진 도로로 버스가 다녔기 때문이다.

특히 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북평면 남평과 여량면에서 버스를 배에 태워 강을 건너는 찻배도 있었다.

정선읍 봉양리에 있던 옛 버스터미널 부지, 지금은 동호장 모텔 옆에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다.  

 

당시 정선읍 5일장에는 장사꾼이 20여명 정도 와서 다양한 물건을 팔았다. 이들 장돌뱅이들은 돈을 많이 벌어 대부분 오늘날 정선5일장이 들어서는 정선시장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비포장 도로 시절 도로관리는 지역주민들의 몫이었다. 최원희 정선문화원 사무국장은 “도로가 움푹 파이면 흙으로 메워 보수하는 등 도로 구간구간마다 주변 집들이 관리하면서 노동 봉사도 했었다”고 말했다. 무임금 노동이었다고 한다.

정선읍 봉양리 구 버스터미널 부근 모습. 1980년대 초로 추정. 

1984년 북실리에 정선공용버스터미널이 신축되고, 2018년 동계올림픽이 정선에서 개최되면서 교통망도 크게 개선됐다. 이곳 터미널에서는 수도권인 동서울을 비롯해 강원권인 강릉·원주권으로 버스가 1일 4~7회 정도 운행되고 있다. 또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주인공인 유지태, 이영애 배우가 처음 만나는 장소로 나오기도 했다.

지난 1984년 북실리에 들어선 정선공용버스터미널 전경. 이 곳은 전시회, 공연, 문화 강좌 등 문화향기가 가득한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현재 터미널은 문화향기가 가득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터미널 건물 지하는 다양한 작품전시회 개최는 물론, 색소폰과 하모니카, 국악 등 문화강좌 공간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또한 작지만 1000여권의 도서를 갖춘 독서공간도 있다. 수년전 쓰레기가 나뒹굴던 창고가 대변신한 것이다.

예전 비포장 도로 시절 버스 표를 팔았던 매표소가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공용버스터미널로 자리매김하기까지 그 아스라한 추억들은 또 다른 지역사랑의 시발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유주현 joohyu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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