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애 낳으면 바보라고 이야기해도 20년째 허송세월” [나의 삶 나의 길]

이강은 2024. 3. 1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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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저출산 문제, 지극히 당연한 진화 현상
힘들 거 알면서 애 낳은 분들은 애국자
역대 정부 ‘헛발질’에 출산율 계속 하락
적은 국민으로 삶의 질 높이기 고민을
어려서 시인 꿈꿨지만 이과 진학 방황
대학 때 美 곤충학자 만난 후 진로 정해
‘제돌이’ 바다로 보낸 것이 가장 잘한 일
사람 빼고 동물을 변호한 유일한 사례
인류는 ‘공생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다윈이 있다면 한국에 소통 주문할 것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금 애를 낳는 사람은 바봅니다. 머리가 정말 얼마나 나쁘면, 아이큐(IQ)가 두 자리가 안 되니까 애를 낳는 거겠죠.”

2021년 11월 한 유튜버가 올린 ‘한국에서 애 낳으면 바보죠’란 제목의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어떤 선진국보다도 저출생 고령화 문제가 심각해 출생률 제고에 비상이 걸린 한국 사회에서 대놓고 “애 낳으면 바보”라고 하다니. 일반 유튜버가 그랬다면 구독자와 조회수 좀 늘리려는 수작인가보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진화생물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최재천(70)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얘기라 귀를 쫑긋 세운 사람이 많았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지난 15일 이화여대 종합과학관 내 연구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 교수는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현명한 인간)’를 넘어 다른 생물종과 더불어 사는 ‘호모 심비우스(공생하는 인간)’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상수 기자
그는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저출산 현상은 진화생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지극히 당연한 진화적 적응 현상”이라며 “‘내가 과연 애를 키워낼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한 개인의 입장에서 굉장히 심각하게 고민한 뒤에도 애를 낳는 분들은 계산이 안 되는 분들”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에선 힘들 거 뻔히 알면서도 과감하게 애 낳는 사람들은 애국자라고도 했다.

반향은 컸다. 2020년 9월 해당 채널을 개설한 지 1년이 넘도록 1만 6000명에 머물던 구독자 수가 순식간에 10만명을 돌파하더니 다른 동영상들까지 인기를 끌었다. 현재 구독자는 69만 5000명에 달하고, ‘애 낳으면 바보’ 동영상(362만회)을 비롯한 249개 동영상의 누적 조회 수가 8000만회에 육박한다.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만난 최 교수는 “사실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이 1.08이던 2005년 쓴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삼성경제연구소)라는 책에서 그런 (비슷한) 발언을 했었다”며 “(정부 등 우리 사회가) 저출생 고령화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지만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생물학자가 진단하는 2020년 초고령 사회’란 부제가 달린 책은 인류가 어느 생물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진화 현상(출산율 감소와 수명 연장에 따른 고령화)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고 심각하게 진행되는 점을 우려한다.  아울러 제대로 된 양육 환경 조성과 조혼 장려, 이민  활성화, 정년제도 폐지 및 세대별 보직·보수 체제 분리 등 혁신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최 교수는 “개정판을 준비 중인데 거의 20년 전에 했던 얘기를 그대로 담아도 될 정도다. 역대 정부마다 헛발질하면서 우리가 20년을 완벽하게 허송세월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실제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합계 출산율은 0.72명에 그쳤다. 올해는 0.6명대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합계 출산율이 1명을 밑도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합계 출산율이 이 수준이면 만회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예요. 이를 인정하고 이제는 덴마크와 스웨덴처럼 적은 수의 국민으로 삶의 질이 높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물론 노동·교육제도 등 사회 구조 전체를 혁신하고 비혼 가정 자녀 인정과 지원 등 출산율을 높이려는 노력은 계속 해야되겠지요.” 다음은 일문일답.

─어려서부터 시골 생활이 좋았고 ‘시인’을 꿈꿨다고 하던데.

“강릉이 고향이다. 아버지는 강직하고 청렴한 군인이라 집이 가난했다.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서울의 큰외삼촌 집으로 가 얹혀 지냈다. 서울에서 초·중·고교를 다녔지만 항상 ‘학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고3 시절만 빼고 방학 때마다 강릉(친가)과 주문진(외가)에서 살았다. 쇠똥구리 잡고, 소 꼴 먹이고, 개울물에서 첨벙거리며 실컷 놀았다. 한국단편소설 전집 등 문학작품을 즐겨 읽었고, 중 2때 교내 백일장에서 시로 대상을 받자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문과와 이과를 나눠서 가르치는 이상한 교육제도 탓에 꿈이 어그러졌다.”

─이상한 교육제도의 희생양이었다는 건가.

“그렇다. 고교(경복고)에 들어간 후 교장이 (고교별 서울대 입학 경쟁에 유리하도록) 문과반 한 개를 줄여 늘린 이과반에 배정됐다. 교장실을 찾아가 ‘제가 문과 영순위입니다. 별명이 시인이에요’라면서 항의했는데도 소용 없었다. 문과를 갔으면 수학 때문에 고생을 안 해도 됐는데 진짜 억울했다. 아버지 뜻에 따라 서울대 의대를 지원했지만 예상과 달리 탈락했다. 재수를 했는데 정말 공부하기 싫어 종로 뒷골목에서 건달 형님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서울대 의대를 또 떨어지고 어쩔 수 없이 1973년에 2지망으로 동물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도 별 재미가 없었을 것 같다.

“국어와 영어를 좋아하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많아 국문과나 영문과, 사회학과를 갔어야 할 학생이 엉뚱한 데로 갔으니 당연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저에게 관심을 꺼달라’고 했다가 선배한테 흠씬 얻어 맞기도 했다.(웃음) 3학년 때까지 공부 안 하고 사진·독서 동아리 등에서 활동하며 놀기만 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75년) 대학 학생회를 없애버리고 만든 학도호국단에서 억지로 문예부장까지 떠맡았다. 박태준씨에게 발탁돼 전역 후 포항제철로 간 아버지가 ‘데모만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게 되나. 데모하다 잡힐 뻔한 순간 관악산으로 도망쳐 위기를 넘겼다.”

─건달과 어울리고, 데모하다 관악산도 넘었다니 의외다. 달라진 계기는.

“3학년 2학기가 끝나자 막막했다. 곧 졸업인데 내 인생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그래도 공부는 한번 해봐야 할 것 같아서 발생생물학 연구실에 배정받아 친구들도 안 만나고 칩거했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살이 연구의 세계적 대가라는 미국 유타 대학의 조지 교수가 곤충 채집하러 한국에 왔다. 조수로 추천 받아 일주일 따라다녔다. 그분이 운전하고 가다 개울물만 보이면 차를 세우고 그냥 들어가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조지 교수에게 ‘개울물 첨벙거리면서도 먹고 살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가능하단다. 심지어 하루살이를 잡으러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그토록 바라던 삶이어서 ‘유학 오라’는 그분의 말에 ‘내가 살 길은 이것(전문 과학자가 되는 것)밖에 없구나’ 결심했다.”

청년 최재천은 대학 졸업과 방위병 복무 이후 동물학과 대학원을 다니다 1979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대학 때 노느라 학점 관리가 엉망이어서 못갈 뻔 했지만 ‘내가 일주일 부려봤는데 이놈 물건이다’는 조지 교수의 추천사 덕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에서 생태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어 ‘현대의 다윈’으로 불리며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하버드 대학 에드워드 윌슨(1929∼2021) 교수의 제자가 돼 본격적으로 생물학 공부를 시작한다. 중앙아메리카 코스타리카와 파나마의 정글을 드나들며 하찮고 알려진 것 없는 곤충 ‘민벌레’를 연구했다. 그러면서 종(種)이 서로 다름에도 한 살림을 차리는 자연계의 전무후무할 사례(아즈텍개미)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두 곤충을 중심으로 박쥐 등 다양한 연구를 하느라 박사 학위를 받는 데 7년이나 걸린다.
─1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당초 한국에선 내 전공 분야를 필요로 하는 데가 없어 미국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영어를 잘 해야만 살아남을 것 같았다. 하버드대 기숙사 사감만 7년을 맡고 파티 등 각종 행사에 참여해 미국 애들과 어울리면서 성대모사 수준으로 영어를 연습했다. 1994년 미시간대 조교수로 있는데 서울대가 식물학과를 생물학과로 바꾸면서 교수직을 제안했다. 그런 공부를 한 사람은 한국인 중 내가 유일했으니까. 15년 전 유학 환송회 당시 ‘곤충을 연구하려면 관악산에 가지 뭐하러 미국까지 가냐. 돌아와서 교수도 못할 텐데’라고 주변에서 비웃었다. 화가 나서 ‘두고 봐라, 너희는 나중에 (교수 자리 놓고) 피 튀기는 경쟁을 하겠지만 나는 무혈입성한다’고 받아쳤는데 정말 그리 된 거다.(웃음)”  

각종 저서와 기고, 강연 등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힘쓴 그는 2006년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자연사 박물관을 국내 최초로 만든 이화여대 측은 삼고초려 끝에 ‘스타 교수’를 데려왔고, 최 교수의 이적은 뉴스로 보도될 만큼 큰 이슈였다. 그는 동강댐 계획 백지화, 호주제 폐지, 4대강 사업 반대, 코로나19 일상회복 지원 등 사회 활동가로도 맹활약했다. 최 교수는 지난해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태생적으로 비겁한 사람인데, 온갖 다양한 사회적 부름에 종종 제 목까지 내걸고 참여한 이유는 그놈의 얼어 죽을 양심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정한 삶을 당부했다. “공정은 가진 자의 잣대로 재는 게 아닙니다. 가진 자들은 별 생각 없이 키 차이가 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자를 나눠주고 공정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그저 공평에 지나지 않아요. 키가 작은 이들에게는 더 높은 의자를 제공해야 공정하고 따뜻한 세상이 됩니다. 공평은 양심을 만나야 비로소 공정이 됩니다.”
─특히, 2013년 ‘제돌이 야생 방류를 위한 시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수족관 돌고래를 제주 바다로 돌려 보낸 걸 평생 제일 잘 한 일이라고 했던데. 

“(내 삶을) 돌이켜 보니까 이런저런 일을 제법 했던데 ‘제돌이’를 빼고는 다 사람을 위해서 한 일이더라.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우리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과 감정을 갖고 있는 그 동물을 변호한 게 태어나서 해온 일 중 제일 멋진 것 같았다.”

─의대 정원 확대 문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정부와 의사 간 충돌은 어떻게 보나.

“지금 의대 가는 학생들은 슈바이처 사고 방식으로 가는 게 아니라 안정적으로 오래 하면서 돈도 많이 버는 가장 좋은 직업이란 것만 보고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의사 숫자가 늘어나면 상황이 안 좋아질 거라 미리 계산하고 반대하는 건데 옳지 않다고 본다. 정부가 정교하고 세련되지 못하게 ‘무조건 2000명 증원할 테니 굴복하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문제다. 하여간 우리 사회가 마주앉아 얘기하는 걸 너무 못한다. 마주 앉아서 풀어야 되는 문제를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반발하고 이게 어른들이 할 짓인가. 양쪽 대표들이 빨리 만나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국민들이 보는 만큼 의사들은 너무 이기적인 주장을 못할 거고 정부도 일방적으로 밀어부쳐선 안 된다. 다만, 의사들은 본분을 다해야 한다. 최근 지인이 암 판정을 받아 큰 병원에 알아보니 새 환자 받을 형편이 안 된다며 거절당했다. 의료대란이 끝나야 치료가 가능할 것 같다는 말에 지인 분이 ‘아휴 그럼 난 죽으란 얘기네’ 해서 마음이 아팠다.”

─청년들의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은 것으로 안다. 힘든 청년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우리 세대는 가난하고 많이 어려웠지만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질지 모른다는 기대로 살았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에겐 그런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잖나. 그래도 자포자기하지 않은 채 노력하며 사는 모습들 보면 짠하기도 하고 기특하다. 대학은 젊은 세대랑 함께 호흡할 수 있어 좋은 곳인데 언제부턴가 캠퍼스에 들어오면 학생들의 장래가 막막한 게 피부로 느껴져 숨이 탁 막힌다. 이들에게 ‘살아보니까 인생 참 길더라. 이번 생은 망했다 같은 얘긴 근거 없으니, 지금 상황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새 시대를 대비해 준비하자’는 말을 해주고 싶다. 사회 변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현실에 기죽지 말고 꾸준히 준비하면 머지 않아 기회가 올 수 있다.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감소 문제도 기성 세대 잘못으로 미래 세대가 뒤집어 쓰게 됐는데 해결도 젊은 세대의 몫이다. 기후 재앙에 벗어나려면 산업구조가 바뀌게 될 텐데 지금부터 그쪽 분야에 기울이면 잘 나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인류에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을 하나 꼽는다면. 

“(공멸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 ‘호모 사피엔스(현명한 인간)’를 넘어 ‘호모 심비우스(공생하는 인간)’로 거듭나야 한다. 인간은 물론 다른 생물종과도 공생해야 한다. 공생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명은 없었다. 다른 생명체들과 이 지구를 공유하겠다는 겸허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많은 사람이 ‘에코(생태) 백신’이라도 맞은 것처럼 자연을 보호하고 더불어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노년에 유튜브까지 하고 열정이 대단하다.  

“유튜브를 하자고 누가 제안했을 때 ‘그런 것도 해야 되나’ 싶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고하거나 대중 과학서를 쓰고 강연하는 걸 새로운 시대의 매력적인 매체로도 하는 거니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봐서 시작했다. 과학은 참 얄궂은 운명을 가진 학문이다. 과학 없이는 인간이 살 수 없을 만큼 너무 소중한 분야인데, 과학자 스스로 ‘중요합니다’라고 계속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준다. 정부가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것 봐라. 스승인 윌슨 교수는 틈만 나면 하버드 법대생들을 가르쳤다. 내가 ‘우리를 가르쳐야지 왜 그러시냐’고 항의하자 ‘법대 출신들이 나중에 이런 걸(과학 관련 제도와 예산을) 다 주무르니까 미리 교육시켜놔야 된다’고 하시더라. 미국에 있을 때는 연구비를 지원받으면 그 일부를 반드시 저서, 기고, 강연 등으로 대중에게 연구 결과 알리는 데 써야 했다. 한국에 와서도 과학 대중화에 애쓴 이유다.”
─‘다윈주의자’로서 다윈이 한국 사회를 보면 뭐라고 했을 것 같은가.

“다윈은 굉장한 소통가였다. 건강 문제로 시골에 살면서 통신 수단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매일 같이 여러 통의 편지를 쓰며 다른 과학자 등 여러 사람들과 소통을 잘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왔다면 너무 불통에다 갈등만 분출하는 사회라 안타까워하고, 제발 소통 좀 잘 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최재천 교수는…●1954년 강원 강릉 출생 ●경복고·서울대 졸업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석사 ●하버드대 박사 ●미시간대 교수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국립생태원 초대 원장 ●생명다양성재단 대표·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 공동위원장 ●미국곤충학회 젊은 과학자상 ●대한민국과학문화상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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