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쟁, 홍범도보다 더한 것이 온다 [세상읽기]

한겨레 2024. 3. 19. 19: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회원들이 지난 12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사무실 복도에서 2기 진실화해위원회 김광동 위원장의 ‘전쟁 중 군인과 경찰이 초래한 피해는 어쩔 수 없다’ 등 민간인 학살 정당화 및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폄훼 발언을 규탄하며 위원장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윤석열 정부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에 대해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정희 정부에서 건국훈장이 수여됐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해군 잠수함에 ‘홍범도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게 공인된 독립운동가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소련공산당 행적을 운운하며 나라 지키는 육사에 적절한 흉상이 아니라고 폄훼했다. 60%가 넘는 반대 여론에도 끌어내겠다 결정했다. 도대체, 왜? 조선일보조차 한탄했다. “지금 홍범도 흉상 갖고 논란 벌일 때는 아니지 않은가.”

논란은 뜬금없지 않다. 뉴라이트에 장악된 윤석열 정부의 치밀한 역사전쟁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부 박민식 초대 장관은 같은 시기였던 지난해 7월, 일제 강점기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한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복무한 백선엽에 대해 “백 장군은 친일파가 아니다. 제 직을 걸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다”고 웅변했다. 장관 임기 시작 2개월 시점에 가장 열심히 한 일이 백선엽 부활이었다. 같은 달 백선엽의 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행위자’ 문구가 삭제되었다.

윤석열 정부의 역사전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이렇다. 공산전체주의와의 성스러운 전쟁. 사전에도 없는 ‘공산전체주의’라는 표현을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내세운다. 공산주의나 북한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다 의심되면 100년 전이든 50년 전이든 역사에서 뜯어낸다. 반면 그들과 맞섰다면 친일이든 독재든 상관없다. 서울 한복판에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움직임도 이 시대착오적 반공전사들의 성전 중 하나다.

이 역사전쟁의 가장 끔찍한 사건이 다가오고 있다. 과거에 벌어진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전쟁터다. 빠르면 5월 ‘빨갱이를 도왔다면 재판 없이 죽일 수 있다’는 취지의 결정이 진실화해위에서 내려질 것으로 예상된다. 결정이 나온다면,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공식기구로서 초유의 판단이다. 빨갱이 잡겠다는 역사전쟁이, 대한민국이 성취한 인권과 민주주의의 처참한 몰락으로 번지고 있다.

구체적인 상황은 이렇다. 현 정부 뉴라이트 전사 중 한명인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은 2022년 취임한 직후부터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 중 부역자를 골라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작년 말에는 ‘6·25 전쟁 같은 전시하에서는 재판 등이 이뤄질 수 없으므로 적색분자와 빨갱이를 (재판 없이) 군인과 경찰이 죽일 수도 있다’라는 명백한 거짓말까지 공식적으로 표명해나갔다.

부역자 몰이의 결과가 지난 12일 위원회 전체위원회에 상정되었다. 1950년 10월 진도군 의신면 주민 등 40여명이 부역 혐의를 받고 재판 없이 한국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건(진도 사건)에 대해, 조사 대상 중 4명에 대해서는 ‘부역자이기에 인권침해가 아니다’라는 ‘진실규명 불능’ 안건이 상정된 것이다. 다행히 위원회는 위 안건에 대한 의결을 2개월 보류했다. 그래서, 이 글의 목적이다. 다가오는 5월, 저 안건이 통과되는 것만큼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든 막자는 것이다.

진도 사건 희생자 4명이 부역행위를 했다는 증거는 극히 취약하다. 학살 19년 뒤인 1969년 가해 주체인 진도경찰서가 작성한 문서에 기재된 “암살대원” 네 글자가 전부다. 그러나 증거의 신빙성 논쟁은 차치하자. 범죄자라도 수사 과정에서 고문을 했다면 인권침해이고, 재심 사유다. 부역행위자라도 법이 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을 의미하는 ‘양민’ 학살만이 아니라 ‘민간인’ 학살을 국가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게 문명이자 법치주의다. 지난 30여년 우리 사회 과거사 청산의 원칙이었다. 그런데 역사전쟁의 광풍 속에서 다시, ‘재판 없이 죽여도 된다’라는 국가의 선언이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2024년인 줄 알았는데 1950년이다.

“비록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국가기관인 경찰이 비무장·비저항의 민간인을 법적 근거나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절차의 원칙,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 민간인 학살 결정문에 반복되어온 문구다. 이 문구를 지켜야 하지 않겠나.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6년 4·3 위령제 추도사다. 이 원칙이 무너지게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겠나.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