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담화 2.0’과 대한민국의 정체성

한겨레 2024. 3. 19. 18: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5년 6월 도쿄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지금까지 50년간 우호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앞으로 50년을 내다보자”고 제안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아침햇발] 길윤형 | 논설위원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주도하는 이들의 정체성은 뭘까. 이 문제를 놓고 2년 가까이 고민해 왔다.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인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지론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올인’하는 것을 이해하긴 쉽지 않았다.

오랜 의문이 풀린 것은 윤 대통령의 지난 3·1절 기념사와 내년에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대체하는 새 문서를 만들고 싶다는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의 발언을 듣고 나서였다. 이는 사실 오래전 일본에서 들었던 레퍼토리의 ‘재탕’이었다. 원조는 아베 신조(1954~2022) 전 총리가 2015년 내놓은 ‘아베 담화’다. 이 두 메시지는 한국이(또는 일본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에 맞서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수호하는 데 적극 기여하겠다는 동일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베 전 총리가 대변했던 일본 보수와 윤 정부를 이끄는 핵심 세력은 사실상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동일한 집단’이란 생각이 든다.

아베 전 총리는 담화에서 “‘어떤 나라’(!)의 자의에도 좌우되지 않는 자유롭고 공정한 열린 국제경제 시스템을 발전”시킬 것이고,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지금 이상으로 공헌해 가겠다”는 각오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어떤 나라’가 이 무렵 동중국해·남중국해에서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중국이란 점은 두번 설명할 필요도 없다. 또 일본과 역사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 등엔 “전쟁과 아무 상관없는 아이들과 손자, 그리고 그다음 세대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며 ‘관용’을 요구했다.

올해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역시 똑같은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윤 대통령은 한·일 두 나라가 “자유·인권·법치의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다고 밝혔고, 북한이 질색하는 흡수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자유로운 통일 대한민국’이라는 주어를 사용하며 한국이 “동북아시아는 물론 인도·태평양 지역과 전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동안 한·일은 역사 갈등이나 북한과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 때문에 하나로 밀착된 공통된 비전을 갖기 어려웠다. 역대 보수 정부들도 일본과 관계를 중시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2012),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위안부 외교(2013~2015)에서 보듯 역사 문제와 관련된 본질적인 원칙을 훼손하지 않았다. ‘같은 핏줄’인 북한은 물론 탈냉전 이후 밀접해진 중국을 대하는 방법에서도 심연과 같은 차이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대북 비밀접근을 한 것(2009·2011)이나 박 전 대통령이 중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 천안문 망루에 오른 것(2015) 등이 좋은 예다. 하지만 윤 정부는 지난해 3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일본에 일방적 양보안을 내놓았고, 이후 단 한번도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요구한 관용을 실천한 것이다. 또 북핵 문제의 해결이 사실상 어려워지고, 미-중 전략 갈등이 심화되는 틈을 타 양국의 대중·대북관을 극적으로 일치시키는 중이다.

윤 정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두 나라의 세계관을 완벽히 하나로 맞추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는 13일 양국이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은 분명”하다면서 “한국과 일본이 함께 바라보는 비전도 지리적으로 (한반도를 넘어) 훨씬 확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현실화된다면, 새 선언엔 대만(동중국해)과 남중국해를 포함한 인도·태평양의 너른 지역에서 두 나라가 군사 협력을 하자는 내용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반성적 역사인식과 평화 헌법을 기초로 만들어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역사는 잊고 군사 협력에 치중하자는 새 선언이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 선언에 가장 적합한 이름은 ‘아베 담화 2.0 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윤 정권 집권 2년 만에 남북관계는 파탄 났고, 한·일은 ‘샴쌍둥이’가 되려 하고 있다. 저들이 하려는 것은 신냉전이라는 변화에 맞춰 우리의 역사인식·대북관·대중관을 재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아예 뒤바꾸겠다는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