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교도소 담장 넘어가는 취약계층

김민형 기자 2024. 3. 1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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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형 금융부장
'햇살론15' 마저 대위변제율 사상 최고
대부업·2금융권, 고금리 탓 가계대출 조여
빚 돌려막는 서민, 생계형 범죄 내몰려
법정최고금리 시장연동 방안 마련해야
[서울경제]

이달 8일 충남 아산 새마을금고. 복면을 한 40대 남성 A 씨가 흉기를 들고 침입했다. 그는 직원들을 흉기로 위협해 1억여 원의 돈을 빼내 도주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미리 준비했던 렌터카로 갈아타는 치밀함도 보였다. 아찔한 활극은 불과 4시간여 만에 막을 내렸다. 그는 경기도 안성의 한 쇼핑몰에서 아내와 식사하고 나오다 주차장에서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여기까지만 보면 영화를 많이 본 한 중년 남자의 철없는 범죄다. 국내 금융기관 강도 사건의 범인 검거율은 거의 100%다. CCTV 덕분에 금융기관 강도는 수사망을 피해갈 길이 없다. 그런데 A 씨가 경찰 조사에서 진술했다는 내용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A 씨는 “빚 500만 원을 갚지 못해 계속 독촉을 받아오다 범행을 저질렀다. 훔친 돈 1000만 원을 빚을 갚는 데 썼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를 옹호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다만 빚쟁이 생활이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검거율 100%인 범죄를 저지르고, 돈을 훔치자마자 곧장 빚부터 갚아버렸을까 싶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말 다중채무자는 450만 명에 달했다.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최대 규모다. 다중채무자의 비중은 전체 가계대출자 중 23%로 역시 역대 최대였다. 다중채무자는 3곳 이상의 금융회사에서 대출을 받은 사람이다. 여러 곳에 빚이 있다 보니 어떤 사정으로 돌려막기가 막히면 연체가 연쇄적으로 발생해 제도권 금융에서 탈락될 수 있다. 다중채무자의 삶은 팍팍하다. 다중채무자의 26%인 118만 명의 소득 중 원리금 상환액 비중이 70%를 넘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뺀 거의 모든 소득을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는 데 쓰는 것이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양정숙 개혁신당 의원이 금융감독원과 서민금융진흥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햇살론15’의 대위변제율은 21.3%로 사상 처음으로 20%를 넘었다. 햇살론15는 신용 평점 하위 20%의 취약 계층에 최대 2000만 원을 연 15.9% 금리로 3년 또는 5년간 빌려주는 정책금융 상품이다. 위기에 처한 차주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사회안전망 성격이 짙다. 그런 햇살론마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취약 계층의 주요 대출 창구인 2금융권은 오히려 가계대출을 조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전국 79개 저축은행의 여신 잔액은 104조 936억 원으로 지난해 1월보다 9.95% 줄었다. 최후의 보루인 대부 업계는 가계대출을 거의 접다시피 했다. 한국대부금융협회에 따르면 69개 주요 대부 업체 신용대출 신규 대출액은 2022년 1월 3846억 원에서 지난해 9월 834억 원으로 78% 급감했다. 같은 기간 신규 이용자 수 역시 3만 1605명에서 1만 1253명으로 64% 줄었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서다. 고금리 탓에 2금융권과 대부 업계의 조달금리는 4~8%가량까지 치솟았지만 법정 최고금리는 20%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취약 계층의 연체율 등을 감안하면 대출할수록 손해라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이 와중에 저축은행은 규제 강화에 따라 올 7월부터 다중채무자들에 대한 충당금을 더 쌓아야 한다. 취약 계층 대출은 더 위축될 게 뻔하다.

취약 계층의 제도권 금융 존속과 금융의 시장 기능 정상화를 위해 법정 최고금리를 시장금리에 따라 연동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방법도 시행령만 개정하면 돼 비교적 간단하다. 정부는 취약 계층이 살인적인 고금리에 내몰리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몇 년에 걸쳐 법정 최고금리를 낮춰왔다. 하지만 기준금리가 오르면서 역설적으로 취약 계층이 돈을 빌릴 곳이 없어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2021년 7월 이후 연 20%로 유지되고 있는 법정 최고금리 인상을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선의로 도입한 제도가 취약 계층을 절대 발을 들여서는 안 될 불법 사금융 시장으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시장에서 더 이상 돈을 구하지 못하는 취약 계층은 결국 교도소 담장을 넘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생계형 범죄’로 불리는 10만 원 이하 소액 절도 사건은 2018년 3만여 건에서 2022년 8만여 건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이대로 가면 안타까운 비극을 더 많이 목격하게 될 것이다.

김민형 기자 kmh204@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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