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은 설치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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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문 틈 사이로 앙상한 철제 침대가 보인다.
방한한 작가는 "바닷가에서 산책하고 조류를 관찰하는 일상을 담았다. 어머니가 작업을 즐거워하시고 적극적으로 임하셔서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늘어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정연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탑골공원 노인들의 기억을 무대 세트로 만드는 영상 작업 '수공기억'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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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문 틈 사이로 앙상한 철제 침대가 보인다. 병실을 연상케 하는 방에는 어지럽게 유리병과 의료도구가 놓였다. 곁의 우편물 더미에는 "예술은 온전한 정신을 보장한다"라는 문구가 적혔다. 1991년작 '밀실 1'은 어머니가 오랜 투병을 했던 루이스 부르주아의 자전적인 작업이다. 사물들의 배치를 통해 기억하고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해내는 행위를 재연한다.
기억은 쉽게 사라진다. 예술은 이 망각의 실을 붙잡을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제주 포도뮤지엄은 3월 20일부터 내년 3월까지 세번째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Perhaps Sunny Days)'을 연다. 이 전시는 노화와 인지 저하라는 이색적인 주제를 다룬다.
알란 벨처, 루이스 부르주아, 정연두, 민예은, 로버트 테리엔, 시오타 치하루, 강서경, 김지영, 천경우 등 10팀이 참여했다. 이들의 작품은 기억과 그리움을 주제로 한 심도 있는 탐구를 선보이며, 인간이 겪는 정체성 상실과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탐색한다.
셰릴 세인트 온지는 인지 저하증(치매)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찍은 사진 작업을 전시하고 조류학자였던 그분의 추억의 물건들을 심지어 새집까지도 아키이브로 전시했다. 방한한 작가는 "바닷가에서 산책하고 조류를 관찰하는 일상을 담았다. 어머니가 작업을 즐거워하시고 적극적으로 임하셔서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늘어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정연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탑골공원 노인들의 기억을 무대 세트로 만드는 영상 작업 '수공기억'을 설치했다. 민예은은 집을 조각조각 해체해 시공간적으로 설치해 기억의 변형 과정성을 은유하고 김지영은 촛불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얻은 시각적 이미지를 거대한 추상화와 드로잉으로 변주했다. 시오타 치하루의 '끝없는 선'은 작년 독일에서 선보인 신작이다. 편지를 쓰는 집필용 책상을 가운데 두고 천장부터 드리운 검은 실들을 사이로 마치 해체돼 사라지는 듯한 모습으로 알파벳이 걸려 있다. 신선한 해외 작가와 젊은 국내 작가를 두루 포괄해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전시를 기획한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디렉터는 "오늘날은 사회적으로도 노령화와 치매에 관한 두려움이 커지는 시기다. 생명을 가진 존재의 연약함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예술의 역할에 주목해 전시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관람료 1만원.
[제주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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