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천지’ 아이티···갱단 폭력에 경찰마저 자경단에 의존

선명수 기자 2024. 3. 1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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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현지시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페티옹빌의 한 거리에서 살해된 가족의 시신을 확인한 뒤 울고 있다. 이날 페티옹빌의 거리에선 총상을 입은 12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EPA연합뉴스

갱단 폭력으로 극심한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에서 일부 주민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갱단에 맞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갱단과 자경단의 충돌로 사상자가 매일 속출하는 상황에서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경찰마저 자경단에 의존하는 등 치안 공백이 심각한 실정이다.

18일(현지시간) CNN은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일부 주민들이 ‘브와 케일(bwa kale)’로 알려진 자경단 운동을 조직해 갱단에 맞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이티의 공권력이 사실상 붕괴한 상황에서 포르토프랭스의 일부 구역은 자경단 활동으로 그나마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자경단원들은 날이 넓은 큰 칼인 ‘마체테’로 무장한 채 지역에서 갱단을 몰아내기 위해 싸우고 있다. 한 자경단원은 “우리는 수년간 끊임없이 갱단의 위협을 받아 왔다”면서 “우리는 우리의 맨손과 마체테로만 무장한 채 싸우고 있다”고 CNN에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지 경찰은 “자경단의 활동을 잘 알고 있고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며 “자경단이 경찰서를 갱단의 공격으로부터 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경단이 갱단 단원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붙잡아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등 양측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보복 행위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자경단은 갱단 단원이나 기타 범죄에 연루됐다고 의심되는 수백여명에게 린치를 가하거나 살해했다. 자경단이 경찰서 앞에서 갱단으로 의심되는 12명을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일도 벌어졌다.

현재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80%는 갱단이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3일 갱단이 포르토프랭스의 국립교도소를 습격, 재소자 3000여 명을 탈옥시키면서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됐던 아이티 치안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갱단은 공항과 경찰서, 정부 청사 등을 잇따라 공격했고, 도시 전역의 식량과 물·연료 공급을 막고 있다. 기업과 학교는 연이어 문을 닫았다. AP통신에 따르면 이날도 포르토프랭스 등 4개 지역 변전소가 갱단의 공격을 받아 일부 지역에 전력 공급이 중단됐다.

이날 포르토프랭스의 가장 부유한 지역인 페티옹빌 역시 갱단의 공격을 받았다. 공격 이후 총상을 입은 시신 12구가 거리에서 발견됐으며, 판사의 자택 역시 공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BBC는 “이는 과도 권력을 위해 경쟁하는 국가 엘리트들에게 보내는 갱단의 분명한 메시지”라고 짚었다.

도시 전체가 ‘무법천지’로 변한 상황이지만 공항까지 폐쇄되며 주민들은 이곳을 떠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때 자동차와 인파로 붐볐던 투생 루베르튀르 국제공항 앞 도로는 ‘종말 이후’의 고요함을 느끼게 한다고 CNN은 보도했다. 주민들은 외출을 자제하며 부족한 식량과 물로 버티고 있다.

18일(현지시간) 아이티 접경 도미니카공화국 국경을 넘었다가 체포된 아이티 피란민들이 다시 아이티로 추방되고 있다. AP연합뉴스

가까스로 도시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 주민들은 인근 지역 학교 등에 마련된 열악한 피란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피란 시설도 문제지만, 피란 지역의 토착 주민들이 피란민의 대규모 유입에 반발하며 이들과 충돌을 빚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지역이 갱단의 새로운 공격 목표가 될 것을 우려해 피란민들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이주기구(IOM)는 “아이티에서 주민 간 불신이 심화하고 있고 사회안전망이 파괴돼 오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엔은 이번 폭력 사태로 1만5000여명이 집을 떠났으며, 아이티 내 전체 피란민 수가 36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주 갱단의 퇴진 압박을 받아온 아리엘 앙리 총리가 사임한 뒤 과도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정치권 협상이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치안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아이티의 일부 정치·경제 엘리트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갱단들 역시 과도위원회 참여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사회는 여전히 적극적인 개입을 꺼리고 있다. 유엔 합의에 따라 아이티에 경찰을 파견하기로 했던 케냐 정부는 앙리 총리의 사임 발표 이후 파견 계획을 보류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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