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위엄을 과시하라”…‘개화파 시조’ 역관 오경석의 배신
“실로 우리나라에 대해선 몸 둘 바가 없는 말이니 절대 외부에 누설하지 말라. 신미년(1871)에 미국 배가 왔을 때 마침 대원군이 전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 나는 대원군에게 도저히 외교를 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득했다. 그런데 미국 선박은 겨우 몇 차례 발포를 받더니 그대로 물러가 버렸다. 그 뒤로 나는 개항가로 지목되어 무슨 일을 말하더라도 다시 채택되는 일이 없었다.”
개항을 목전에 둔 1870년대 중반 조선이 맞닥뜨리고 있던 최대 외교 현안은 일본과의 ‘서계 문제’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그해 12월 쓰시마를 통해 조선에 새 정부의 성립을 알리고 국교를 재개하자는 국서를 보냈다. 조선 훈도(조선 동래부와 왜관 사이에서 외교 실무를 담당하던 관직) 안동준은 중국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황’(皇)과 ‘칙’(勅) 등의 용어가 들어가 있고, 그동안 써온 조선에서 지급한 도장을 쓰지 않았다며 문서 수령을 거부했다. 그로 인해 외교가 멈추게 되자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괘씸한 조선을 손봐야 한다는 정한론(1873)을 내세우게 된다. 그를 만류한 것은 ‘이와쿠니 사절단’을 통해 1년9개월에 걸쳐 세계 문물을 둘러보고 온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었다. 당장 조선을 손봐야 한다는 이들과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한 이들 사이의 대립으로 메이지 정부가 둘로 쪼개지게 된다. 이를 ‘서계 문제’라 한다.
서계 문제로 인한 한-일 외교 경색을 풀고 1875년 9월 운요호 사건의 시시비비를 따진다는 명목으로 일본이 구로다 기요타카를 특명전권변리대신으로 임명해 조선에 파견한다고 결정한 것은 1875년 12월9일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강력한 군사 압박을 가하기 위해 보유 중인 함선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군함 닛신·모슌, 특무함 다카오마루, 기선 겐부마루·하코다테마루·교류마루 등으로 구성된 일본 함대는 1876년 1월15일 쓰시마를 출발해 부산에 입항했다. 대규모 일본 함대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깜짝 놀란 조선의 임시 훈도 이준수 등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일본은 “구로다 대신과 이노우에 가오루 부대신이 쓰시마에서 강화도로 가 귀국의 대신과 만나서 의논하려 한다. 나와서 접견하지 않으면 아마도 곧바로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는 사실을 일방 통보했다.
이 변고를 알리는 동래 부사 홍우창의 장계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27일이었다. 크게 긴장한 조선은 일본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접촉을 시도했다. 1월30일 오전 9시 반, 조선의 외교 당국자 둘이 대부도 앞바다에 정박한 닛신에 올랐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의 부친인 사역원 당상 오경석(1831~1879)과 동래 왜관에서 일본과 외교 실무를 담당해온 훈도 현석운(1837~?)이었다. 일본의 카운터 파트라 할 수 있는 미야모토 오카즈와 모리야마 시게루가 이들을 맞았다.
148년 전 이뤄진 이 대화록은 1876년치 생산 문서를 묶어둔 ‘일본외교문서’ 제9권에 수록돼 있다. 책의 가장 앞에 수록된 사건이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을 담은 ‘강화도 사건의 해결 및 일선수호조규(조일수호조규)체결 1건’이다. 대화록은 자료군의 6번 문서에 담겨 있다. 당시 양국을 둘러싼 외교 현실에 대한 속 깊은 얘기가 오간 탓에 분량은 무려 13쪽에 이른다.
강화도로 가겠다며 막무가내로 북상 중인 일본과 일종의 예비회담에 나선 오경석은 놀랍게도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라 말해도 좋을 내용을 입에 담는다. “금일의 형세로 보면, 대신이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곧장 상륙해서 위엄을 보이는 것이 최선이다. (중략) 내가 지금 우리나라에 대해 이런 말들을 토로하는 것이 실로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귀 대신(구로다)은 강화에 도착하면 가능한 한 위엄을 과시하라.” 이 말에 다소 당혹스러움을 느꼈는지 모리야마는 “대신의 뜻이 어떨지 모른다”고 대꾸했다. 오경석이 아랑곳하지 않고 “이 정도 말했다면, 우리나라의 사정을 대개 꿰뚫어봤을 것”이라고 하자, 미야모토는 “그렇다. 매우 잘 알았다”고 답한다. 조선이 다시 시간을 질질 끌며 문호 개방을 거부할 수 있으니 군사적 압박을 가해서라도 일본의 뜻을 관철해야 한다고 부추긴 것이다.
서구 열강이 아시아로 힘을 뻗쳐와 종주국인 청이 아편전쟁(1839~1842, 1856~1860)과 태평천국의 난(1850~1864) 등으로 거덜 나고 있다는 사실은 조선에도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특히 ‘역관’ 오경석은 이런 민감한 정세를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김종학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저서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를 보면, 오경석은 1853년 진하겸사은사(축하사절) 강시영의 수행역관으로 처음 베이징에 간 뒤 1875년까지 무려 13차례나 중국을 왕래했다. 1860년 방문 땐 베이징이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함락돼 늙은 제국인 청이 굴욕적인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 직후의 참상도 목격했다. 이런 사실을 보고받은 철종 역시 1861년 1월 “중국 같은 천하의 대국도 서양의 적을 막지 못했으니 (중략)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한탄한다.
권력을 이어받은 대원군은 병인양요(1866)·신미양요를 통해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막아낸 데 고무돼 배외정책을 꺾지 않고 있었다. 훗날 김옥균·박영효로 이어지는 조선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게 되는 오경석은 조선이 세계의 대세를 깨닫고 적극적인 개방 정책에 나서려면 우물 안 개구리들을 깜짝 놀라게 할 강력한 ‘죽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훗날 그의 아들 오세창은 1944년 고균(김옥균의 호)기념회가 펴낸 ‘김옥균전’에서 부친이 “중국에 체재 중 세계 각국이 각축하는 상황을 보고 들으며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각국의 역사와 흥망사를 연구하여 자국 정치의 부패와 세계의 대세에 뒤처졌음을 깨닫고, 언젠가는 장래에 반드시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느껴 크게 개탄하는 바가 있었다”고 적었다.
조선에 강력한 죽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이날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김종학의 연구에 따르면, 오경석은 베이징에 주재하고 있는 영국 공사관의 서기관 윌리엄 메이어스를 1874년 3월7일, 27일, 이듬해 2월16일 등 무려 세번이나 찾아갔다. 이때 입에 담은 말 역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옛 체제로부터 이탈에 대한 지배계급의 거부감이 대단히 크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는 오직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당신들이 정말로 (조선에) 오겠다면 반드시 충분한 병력과 문제를 매듭짓기 전까진 조선에 머물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한다”, “조국에 대해 슬픔과 우려를 동시에 느끼고 있으며 현재 우리의 운둔이 지속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메이어스는 본국에 전하는 문서 속에서 오경석이 조선의 개방과 관련해 드러낸 광기 어린 정념을 ‘기묘한 희망’(a singular hope)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오경석의 간절함이 아니었어도 조선이 변할 수밖에 없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1873년 12월 고종의 친정이 이뤄진 뒤 일본과 국교 재개를 둘러싸고 극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음은 당시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종 11년 6월29일(1874년 8월11일) 경복궁 인정전에서 열린 회의에서 영의정 이유원은 서계 문제를 언급하며 “갑자기 3년 동안 (일본과) 관계를 폐쇄하고 약조를 폐기한 것과 다름없이 됐다”고 말했다. 우의정 박규수가 말을 받았다. “대마도주가 황제요 칙서요 한 것은 그들 자신이 높여서 부른 것이지 우리나라에서 ‘황제’요 ’칙서’요라고 불러달라는 요구는 아니다.” 일본이 ‘황’이나 ‘칙’이란 용어를 쓴 것은 일본 국내용에 불과하니 구애받지 말고 교류를 재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1875년 4월엔 대원군의 대일 강경외교를 담당하던 안동준의 목이 잘렸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인 1874년 8월4일 청의 외부가 조선에 급보를 보내온다. 이들은 일본이 1874년 5월 대만에 출병해 원주민들 토벌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출정 부대의 일부인 약 5000명의 병력이 현재 나가사키에 주둔해 대만 사건이 해결되면 조선에 출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은 “일본이 조선을 넘겨본 지가 어제오늘이 아니라는 것은 외국의 신문지상에도 자주 실리는 말”이라고 회신했다. 오경석이 호들갑을 떨지 않았어도 일본은 조선에 강력한 군사적 압박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조선이 이 급격한 충격을 견뎌낼 수 있느냐였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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