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덤덤, 일본에겐 걸작…고려다완의 수수께끼
이 옛 그릇을 우리는 덤덤하게 보는데, 일본 사람들은 왜 최고의 걸작 혹은 귀물이라면서 감동할까.
지난달부터 일본 도쿄 아오야마 거리의 네즈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절찬리에 열리고 있는 두개의 기획전 ‘매혹의 조선도자(魅惑の朝鮮陶磁)’와 ‘오쿠고려다완의 수수께끼(謎解き奥高麗茶碗)’(각각 26일까지)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숱한 고려다완 명품들은 이런 물음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국내 애호가들이나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려다완은 고려시대의 찻그릇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분청사기와 백자사이의 경계에서 ‘막사발’로 불렸던 조선시대의 평범한 식기그릇이다. 조선시대 초 중기인 15세기부터 도자장인들이 무심한 생각으로 식기에 쓰려고 대충 만들어두었던 것을 16세기 차문화를 애호한 일본의 무사권력자와 귀족, 문인들이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에 우연히 흘러들어온 이 그릇들을 보고 홀랑 반해 자신들의 정적이면서도 세심한 미의식을 투영해 자신들의 심미적 감상 거리로 만들었다.
그래서 무늬도 없고 곳곳에 금이 가고 태토의 질이 낮아 구멍이 터지고 아래 굽에는 유약조차 묻지 않거나 대충 묻혀 구질구질하게 흘러내린 흔적을 보고 그들은 감격해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느껴지는 선연한 계절의 감각이나 고독하고 핍진한 삶의 정취를 질감으로 보여준다는 식의, 흔히 ‘모노노아와레’로 대표되는 일본인들의 애틋한 정감을 품격 높게 보여준다는 등의 상찬을 쏟아낸다. 어떤 작위도 들어가지 않고 만든다는 것과 삶에 충실한 무위와 무심의 미학으로 백자와 청자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심미관으로서는 납득하기도, 동감하기조차 쉽지 않다.
네즈미술관의 전시는 이렇게 극명하게 보는 미감과 관점이 다른 고려다완을 두가지로 나눠 이번 전시에 내놓았다. ‘매혹의 조선도자’ 전에서는 조선 땅에서 제조한 일종의 ‘오리지널’ 원본품으로 일본 다인들이 극찬했던 조선 특산 고려다완 명품들 16점을, ‘오쿠고려다완의 수수께끼’ 전에서는 주로 일본 규슈 북부의 가라쓰 지역에서 조선 다완을 모델로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일본 다완의 명품 ‘오쿠고려다완’의 주요작품 34점을 내놓았다.
일본 현지의 유명 소장자들을 교섭해 자기네 미술관 소장품과 함께 한자리에 출품한 것인데, 국공립 전시관에서 드문드문 나오던 고려다완들의 주요 명품들을 원본품과 모델본 작품까지 망라해 볼 수 있는 전시는 사실상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 도자기에 얽힌 다채로운 스펙트럼과 시선의 지정학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사설 도부철도의 경영자였던 네즈 가이치로가 1941년 세운 고미술품 전용 미술관으로 일본의 ‘리움’이란 별명도 지닌 네즈미술관의 안목과 품격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단 조선에서 생산된 고려다완은 ‘매혹의 조선도자’의 다섯번째 항목에서 전시되는데, 고려다완의 시발이라 할 도장 무늬를 백토 위에 촘촘하게 찍은 15세기 인화문 다완으로 시작된다. 앞선 1~4항목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목긴 토기와 정연한 토기 주자, 불경을 넣어두던 집 모양의 고려청자감실, 소담한 식물무늬가 사방에 들어간 조선의 청화백자항아리 등을 통해 조선도자의 독창적인 전통을 소개하는 것으로 채워져 고려다완의 등장배경이 토기와 청자, 백자, 분청사기 등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스탬프 찍듯 도장문양을 찍은데서 비롯되어 매화의 꽃과 등걸 무늬나 고래껍질의 무늬 등으로 비유되는 거친 고려다완 특유의 유약 흔적과 유약이 조금만 묻은 굽의 문양 변천과정을 담았다. 이후 조선시대의 고려다완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형식적 변용과정과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취향이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과정이 축적돼 조선에 그들의 취향대로 주문을 하고 급기야 조선후기 부산 왜관에 도쿠가와 막부의 장군이 그린 그림을 본으로 삼아 주문한 다완들이 나오게 된다.그 뒤를 이어 조선 후기회화의 스타일을 드러낸 학과 난초 문양이 표면에 베풀어지는 다완까지 선보이면서 조선 생산 도자를 배경으로 다채롭게 전개된 그들만의 취향의 역사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일본 오쿠고려다완의 기획전에서는 이 다완이 17세기 일본 가라쓰지역에서 불과 20여년간 생산됐던 독특한 기종이란 점을 처음 제시하면서 일본 현지의 문화에 조선장인의 고려다완 미학이 독특하게 융화되는 과정을 실물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오쿠다완은 애초 경남 웅천(진해 인근) 지역의 민간 가마에서 일하다 납치되거나 초청된 조선 장인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장에는 웅천 가마 제작품의 영향을 직접 받은 초창기 가라쓰 지역의 오쿠고려다완부터 고려다완에 매혹된 교토 지역 귀족, 무인들의 완상 취향에 맞춰 상인들이 여러 조건을 제시하며 주문한 17세기 최상급 다완에 이르기까지 30여점의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었다. ‘덤벙’이란 말로 대표되는 국내 장인들의 무심함과 전혀 다른 일본 장인들의 세심한 필치와 구성의 독자적 특성, 유약의 흔적, 아련한 번짐 무늬 등이 드러난 양상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현해탄 바다가 두 지역을 갈라놓았지만, 바다 사이를 오간 미의식과 취향의 교류, 그리고 무엇보다 막대한 분량의 도자기의 교역과 모델의 수출 등을 통해 조선과 일본은 숙명적으로 서로에게 메신저가 될 수밖에 없음을 전시는 보여주었다. 놀라운 것은 전시를 기획한 주역이 85살의 동아시아 도자사의 국제적 권위자인 니시다 히로코 선생이란 점이다. 네즈미술관의 부관장을 역임한 그는 수십년 전부터 한국과 일본의 도자 교류사는 물론 실크로드에도 인연이 있는 청자·백자 교역의 루트를 찾아 한국과 중국, 실크로드 답사를 평생 해오면서 그 마지막 아퀴를 짓는 작품으로 이번 고려다완 전시를 기획했다. 여전한 학문적 열정으로 고려다완의 새로운 실상을 보여준 그의 성취에 경외감을 느꼈다.
한편, 인근 노기자카 역 바로 앞에 있는 국립신미술관에서는 한국인 큐레이터 윤지혜씨가 기획한 ‘원거리현재’전(6월3일까지)이 열리고 있기도 하다. 코로나 시국의 불안과 실존을 테마로 한국과 일본, 유럽, 미국 작가들의 여러 영상 회화, 사진작품을 모았는데 코로나 이전의 사회적 불안과 모순 등을 담은 작품들을 통해 코로나 시절을 회상하고 성찰하는 구도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바로 위층에서 열리고 있는 마티스 명작전 ‘자유로운 포름’(5월27일까지)도 빼놓을 수 없는 감상 거리다.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정물화와 인상파의 작풍을 연상케하는 빛의 구도가 충만한 초기작들과 ‘재즈’ ‘브레송’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후기, 말년기 색종이 드로잉 작품집, 그리고 최만년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방스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벽화 제대 등이 생생하게 재현된 입체공간이 보는 이를 매혹시키고 있다.
도쿄/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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