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성경을, 신부가 불경을 읽은 까닭은
불경 성경 서로 읽기
얼마 전 갑진년 설을 맞아 오랜 인연이 있는 후배 스님 두분이 나의 처소를 찾아왔다. 반갑게 인사를 마치고 차를 나누는데, 한 스님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아니, 이제 성경도 읽으십니까?” 평소 경계를 가리지 않고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나의 독서 습관을 알고는 있었지만 불경을 읽는 경상 위에 성경이 단정하게 놓여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던 모양이다. 빙그레 웃으면 말했다. “응, 요즘 신약 읽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이어 조금 부연했다. 나의 하루 일과는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방에 들어오면 벽면에 모셔져 있는 불화 앞에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정진하는 일로 시작한다. 먼저 화두를 들고 참선한다. 그리고 ‘나무 아미타불’을 천번 염송한다. 염불수행이 끝나면 30분 정도 성경을 읽는다. 묵독하기도 하고 소리내어 경건하게 읽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부처님 전에 절을 열 번 올리고 모든 이웃들의 평안과 행복을 기원한다. 이렇게 새벽 일과를 마치면 마음은 더없이 고요하고 청정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텅 빈 충만의 시간이다. 오직 감사와 기쁨의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삼매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성경 읽기가 나의 생활 속으로 들어온 인연이 있다. 작년 봄, 학문적으로 신학과 불교를 자유롭고 깊게 넘나드는 정경일 박사가 매우 의미 있는 제안을 해왔다. 불자와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여 불경과 성경을 읽고 함께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매우 반갑고 고마운 제안이 아닐 수 없어 즉각 응했다. 그래서 작년 봄에 칠곡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왜관 수도원을 방문했다. 조성택 교수, 정경일 박사, 이진권 목사, 그리고 내가 수도원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박재찬 안셀모 신부와 만났다. 언제 한번 방문하고 싶었던 왜관 수도원을 가게 되었으니 실로 시절 인연이고 실로 하느님의 뜻인가 싶었다. 서로가 차를 마시며 종교 간의 대화 주제를 정했다. 안셀모 신부님이 대화 주제를 잘 초안한 덕분에 일행은 기꺼이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주제는 ‘부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으로 지금 여기를 사는 길’로 정했다. 나는 이 주제가 참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생동하는 삶의 너머에서 기쁨과 복락의 길을 찾고 있는 오늘의 종교 현실은 얼마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가? 해탈과 구원을 그분의 말씀에서 찾지 않고, 말씀에 의지하여 자기 성찰을 하지 않고, 깨달음이 그대로 자비와 사랑으로 구현되지 않는 수행과 신앙은 얼마나 볼품이 없는 껍데기인가? 이렇게 진리와 말씀에서 너무도 어긋난 종교적 행태를 냉엄하게 점검하고, 붓다와 예수의 깊고 간절한 마음에서 중생과 어린 양이 ‘지금 여기’에서 열반과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찾고자 하는 출발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불자와 그리스도인의 이런 ‘일치’가 참으로 고맙고 그지 없다. 그날 우리들은 ‘뜻’으로 만났다.
우리들은 불경과 성경 교차 읽기의 방식을 정했다. 작년에 소천하신 길희성 선생이 세운 강화도의 심도학사에서, 불자와 그리스도인 30여 명 정도를 초청하여 함께 불경과 성경을 공부하고 두 종교의 명상을 하기로 했다. 함께 공부하는 주제는 세 가지로 정했다. 첫재 주제는 자기 비움과 초월, 두 번 째 주제는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있는 열반과 하느님 나라, 세 번째 주제는 경계 없는 사랑: 그리스도교의 사랑(Caritas)과 불교의 자비(Karuna)이다. 나도 만나기 전에 대략 이런 생각을 했는데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매우 적절한 주제였다. 각 주제에 맞게 신부님이 성경에서, 내가 불경에서 이에 적합한 말씀을 가려 뽑기로 했다. 혹자는 아마도 이렇게 짐작할 것이다. 안셀모 신부님이 성경 말씀을 불교와 연관 지어 말하고, 내가 불경을 성경과 연관 시켜 말할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애초에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안셀모 신부님이 제시한 성경 말씀에 대해 나의 생각을 말하고, 신부님은 불경을 강론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만이 신부님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결코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선한 의도의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각자를 진지하게 긴장하게 하고, 그 팽팽한 긴장은 몰입의 직관을 통해 각자와 서로의 깊이를 더해 줄 것이다. 하여, 올해에 있을 이 말씀의 향연을 나는 매우 기대하고 있으며, 나아가 나의 공부를 깊게 해 주고 확장해 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나는 본격적으로 성경을 하루 일과로 정해 놓고 읽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 엄숙하고 경건하며 기쁨이 넘치는 법석(法席)이 아니겠는가?
나와 그리스도교 인연은 내가 붓다에게 출가한 중학교 3학년 이전에 있었다. 광주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교회를 다닌 전력이 인연의 전부였다. 그저 호기심과 재미로 교회를 다녔으니 예수님 말씀 한 구절 제대로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그 당시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교회의 분위기 때문에 반감만 가지고 인연을 접었던 기억이 있다. 특히 이해되지 않았던 점은 중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붓다와 절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던 목사님의 설교에 당혹했던 것이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와 함께 교회는 관심에서 멀어졌다. 출가 이후 불경과 함께 인문학과 사회학에 대해 천착하면서 자연스레 그리스도교 서적을 주마간산으로 읽었다. 정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나의 호감과 천착은 성경에 있지 않았다. 8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정의롭게 참여하는 예수님 제자들의 몸짓에서, 나는 불교수행자인 나의 자리를 고뇌했고, 예수님의 뜻과 실천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여기서 다시 붓다와 예수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들을 따르는 제자들은 본다. 우리 제자들이 그분들의 뜻을 따르고 있는가를 묻는다. 다시 그분들의 뜻을 잘 따르기 위해 그분들의 ‘뜻’을 잘 알고, 잘 새기고, 지금 여기에서 잘 실천하고 있는가를 점검한다. 이런 삶이 곧 수행이고 기도가 아니겠는가? 뜻을 잘 알고, 잘 새기고, 잘 실천하기 위해 서로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화 마당의 주제가, 부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으로 ‘지금 여기’를 사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부처님과 예수님의 뜻이, 지금 여기에서 진리를 밝히고 우리 모두가 열반과 하느님 나라에 살기 위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조금 살펴보기로 하자. 안셀모 신부님과 내가 모신 두 성인의 말씀을 옮겨보기로 하자.
<경계 없는 사랑: 그리스도교의 사랑(Caritas)과 불교의 자비(Karuna)>
착한 사마리아인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장 29-37절’
똥치는 사람에 대한 자비
부처님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안으로 들어가 차례로 탁발하면서 불가촉천민의 집에 이르셨다. 그때 똥지게꾼은 멀리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속으로 부끄럽게 여겨 부처님을 피해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어느새 그곳으로 가서 그 사람 앞으로 다가오셨다.
똥지게꾼은 ‘내가 메고 있는 이 똥통에서는 몹시 더러운 냄새가 나는데 내가 지금 어떻게 부처님을 뵐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부처님을 피해 달아나다가 어느 연못가에서 똥통 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통이 깨져서 깨끗한 땅이 오물로 더럽혀졌다. 그는 땅 주인에게 호통을 들을까 겁이 나서 또다시 달아나려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그대 때문에 여기에 왔는데 어디로 가려 하오?”
똥지게꾼이 대답했다.
“제 몸이 더러워 감히 부처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없기 때문에 피하려고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일찍 부모를 잃었고, 게다가 친척도 별로 없어 처자식도 없이 외롭고 가난하게 살면서 똥 푸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고 자비스럽게도 이런 죄인과 이야기를 하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나를 따라오시오. 그대를 출가시키려 하오.”
똥지게꾼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옥에 있는 중생이나 아귀 혹은 축생도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똥지게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주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행을 닦으면서 부처가 된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오.”
부처님께서는 그를 목욕시키고 기원정사로 데려와서 출가시켰다.
그는 부지런히 수행한 끝에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었다. ‘출요경’
사람들은 부처님과 예수님의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분들이 진리를 말하고 끝없는 자기 비움과 사랑을 실천했고 뭇 사람들을 위해 헌신과 사랑을 주셨기에 존중하고 배워가며 공동선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기에 배타하고 반목하지 말고 화합과 일치를 구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 희생, 헌신, 자비, 사랑이라는 명사에만 묶인다면 그 깊고 거룩한 뜻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을 것이다. 구체적 서술을 겸허하고 진지하고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모든 말씀은 그분의 당시의 ‘지금 이 자리’였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항상 당시의 사람들과 함께 살았음을 명심할 때 그분들의 뜻이 보이고, 21세기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보일 것이다. 예수님의 뜻을 읽은 사람은 레위인인가 사마리아인인가? 경계를 초월하여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예수의 뜻을 읽은 사람이고, 나아가 그는 부처님의 조건 없는 자비행을 실천한 그가 부처님의 뜻을 읽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카스트라는 신분차별사회에서 계급의 허위를 부정하고 가슴의 통증에 직면하여 눈길을 주고 손을 내미는 불자가 있다면 그가 곧 예수님의 뜻을 읽은 사람이 될 것이다.
이제 불자와 그리스도인은 함께 공부해야 할 문명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삶에서 뜻을 읽어내고, 그 뜻을 함께 실현해야 할 소명이 있다. 그 길이 진정한 대화의 길이다. 자기 비움을 통한 수행과 기도, 경계화 차별을 두지 않는 헌신과 희생의 길이 곧 열반과 하느님 나라를 여는 길이 될 것이다. ‘선설(善說)이 불설(佛說)이다’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이 말씀했기에 부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옳은 뜻이라면 누가 말해도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 옳은 뜻이라면 불자가 말해도 곧 예수님의 말씀이다. 신학자 한스 큉이 말했다.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마음의 평화 세상 삶의 평화는 이웃 종교에 담긴 뜻을 구체적으로 삶과 연결 시켜 잘 읽어낼 때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뜻이 크게 다르지 않는데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불자와 그리스도인이 함께 불경과 성경을 함께 공부할 심도학사를 연 길희성 선생의 역작 중의 하나가 ‘영적 휴머니즘’이다. 영성, 각자가 지닌 깊은 뜻을 스스로 읽어내면 사람이 자연스레 열릴 것이다. 우리는 그런 종교의 시대를 맞고 있으며 그 길을 열어야 한다.
글 법인 스님/ 지리산 남원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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