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영 디렉터 "생명 연약함에 연민, 예술 역할 주목"…'어쩌면 아름다운 날들'展
(서귀포=뉴스1) 김일창 기자 = 인간은 망각의 동물.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 많은 기억을 잊고, 잃어버리며 살아간다. 우리에게 기억은 무엇이고, 잊는다는 것, 잊히는 것은 무엇일까. 노화에 따른 인지저하증(치매)을 겪는 이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예술가들과 만나 하나의 전시를 이뤘다.
제주 서귀포에 위치한 포도뮤지엄은 기억의 불완전성과 유한함을 통해 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Perhaps Sunny Days)을 오는 20일 개막해 1년간 이어간다고 19일 밝혔다.
전시를 기획한 티앤씨재단 이사장인 김희영 뮤지엄 총괄디렉터는 알란 벨처(Alan Belcher),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쉐릴 세인트 온지(Cheryle St. Onge), 정연두, 민예은, 로버트 테리엔(Robert Therrien), 더 케어테이커&이반 실(The Caretaker&Ivan Seal), 데이비스 벅스(Davis Birks), 시오타 치하루(Chiharu Shiota), 천경우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기억의 불완전성과 유한함을 통해 생의 본질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뮤지엄은 누구나 마주하게 될 삶의 후반기를 '어쩌면 더 아름다운'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점차 많은 인구가 겪게 될 인지저하증을 처참한 질병이 아닌 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사회적 공감이 우선되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벅스의 '재구성된 풍경 39', 민예은의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 시오타의 '끝없는 선'은 조각난 기억을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벅스는 건축 현장에서 버려진 합판 위에 풍경화를 그려 파괴한 후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전통적인 의미의 풍경화 기능은 상실했지만 그로 인해 또 다른 풍경을 펼쳐내는 데서 시간과 상실,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민예은의 작품은 천장과 벽이 조각나 공중을 떠다니거나 바닥에 놓여있는 등 여기저기 흩어진 모습이다. 소환할 때마다 매 순간 왜곡되거나 재구성되는 기억의 본질을 직시하는 느낌이다. 찢어진 달력과 거꾸로 매달린 시계는 불완전한 잠재의식 속 기억의 단편을 드러낸다.
시오타의 '끝없는 선'은 책상에 앉아 있는 우리, 그 머릿속의 무수한 생각을 직관적으로 풀어낸 듯한 작품이다. 작가는 이렇듯 무수한 실을 엮은 공간을 통해 생명, 삶, 죽음, 기억과 같은 보편적인 기억과 경험에 축적되는 무형의 감정들을 전달한다.
작품 '마망'(Maman)의 작가 브루주아의 '밀실1'은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문짝들이 원형을 이루고, 그 안에 앙상한 철제 침대, 어지럽게 놓인 유리병과 의료도구들이 가득하다. 작가의 유년 시절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룬 이 작품은 누군가의 고립된 세월과 심리적 경계를 유추하게 한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행복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은 온지 작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는 사진 그 자체로 따뜻한 행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어머니의 치매 진단으로 사진 작업을 중단했던 작가는 어느날 오후, 어머니의 모습을 문득 바라보면서 그의 모습을 가볍고 명랑하게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손에 닿는 모든 카메라로 어머니의 모습을 기록한 그는 "새롭게 마주한 현실, 그 속에서 새롭게 관계를 쌓아나가고 어떻게 추억을 공유할지 고민한 결과가 이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김희영 총괄디렉터는 "노화나 인지저하증에 대해 갖는 두려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며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연약함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예술의 역할에 주목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유료 관람.
ic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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