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임용한의 전쟁사]〈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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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년 3월 16일(음력 2월 1일)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 앞 들판에서 강감찬의 고려군과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격돌했다.
거란군으로서는 최후의 고비였다.
고려군 입장에서는 반드시 섬멸해야 하는 전투였다.
고려군이 패하거나 거란군이 큰 희생 없이 빠져나간다면 거란군이 또 침공해 올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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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은 감격스러운 승리였지만, 이 승리로도 막을 수 없는 비극이 무수히 많았다. 포로가 되어 고려나 거란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천민이었던 양수척이 거란의 후예라는 말도 있지만, 양수척도 그렇고, 거란으로 끌려간 고려인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잊혀졌거나 혹은 고의로 외면한 탓에 전하지 않는다. 고려인이든 거란인이든 포로가 된 후에도 20년, 30년 지속되는 전쟁 중에, 분노한 주민들로부터 이들이 엄청난 핍박과 탄압을 받았으리라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귀주대첩의 소식이 거란에 전해졌을 때, 거란에 있던 고려인들은 어떤 일을 당했을까?
백성들은 적군에 의한 피해만이 아니라 기아, 가난, 범죄로 고통을 받는다. 전후에 자신을 쏜 적의 병사와 만나서 악수하고, 건너편에서 싸웠던 적의 지휘관을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에게 고통의 기억과 분노는 세대를 넘어 100년이 지나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수천 년의 인류 역사 동안 전쟁이 주는 교훈은 한결같다. 우리가 강하거나 받은 타격 이상의 보복을 할 능력이 있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추려면 평화 시에도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희생과 경제적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사고가 난다고 훈련을 축소하고, 시끄럽다고 군대를 쫓아내고, 전쟁을 도발할 우려가 있다고 군비를 줄이고, 기동훈련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전쟁과 100년의 고통을 부른다.
임용한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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