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이 남긴 ‘묘지기 관련 당부’ 유언[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2024. 3. 18.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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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의 유언을 포함한 1775자가 새겨진 광개토왕릉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물어보면 응답자 가운데 다수는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을 지목하곤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장을 누비며 고구려를 일약 ‘동북아의 패자’로 견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온 세상을 호령하던 광개토왕은 재위 22년이 되던 서기 413년 10월,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의 장례식은 이듬해 9월 성대히 거행되었고 왕위를 이은 장수왕은 그에 즈음하여 무덤 가까이에 거대한 비석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유명한 광개토왕릉비다.

그런데 이 비석에 새겨진 1775자 가운데 광개토왕의 유언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비석에 새길 만큼 중요한 유언은 무엇이고, 그는 왜 자손들에게 그와 같은 당부를 한 것일까.

광개토왕릉비에 새긴 1775자 내용

668년 고구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궁궐뿐만 아니라 역대 왕들의 무덤도 약탈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국강(國岡), 즉 나라의 언덕에 우뚝 솟아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었던 광개토왕릉비 역시 세인들의 기억에서 차츰 사라졌고 언제부터인가 마을 어귀를 지키는 표지석으로 지위가 떨어졌다.

이 능비에 봉인된 ‘광개토왕 이야기’가 다시금 세상이 나오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19세기 후반 청나라에서는 오래된 비석 탁본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그러한 분위기에서 이 능비가 재발견되자 좋은 탁본을 구하려는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겨났다.

능비가 다시금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무렵 그것의 표면에는 오랜 세월의 무게를 보여주듯 이끼가 두껍게 붙어 있었기에 글자가 선명한 탁본을 만들기 어려웠다. 탁본에 종사하던 촌로는 그것을 제거하기로 하고 가축 배설물을 비석 표면에 바른 다음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불을 질렀다. 그 결과 이끼를 일부 태울 수는 있었지만, 비석 표면의 글자들까지 망가졌다. 이어 글자가 선명한 것이 오래된 탁본으로 여겨져 고가에 거래된다는 점에 착안한 그 촌로는 다시 비석에 회를 발라 글자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내가 잡아 온 한·예 사람을 묘지기로”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1972년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 교수는 능비의 비문이 일본군 참모본부에 의해 변조되었다는 학설을 제기했다. 일제강점기 이래 일본 관학자들은 이 능비에 적힌 신묘년(391년) 관련 기사(비문 일부)를 두고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깨트리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왔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 경향을 기저로부터 흔들었다. 그 이후 비문 변조의 주체가 일본군 참모본부가 아닌 탁본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촌로였다는 학설이 더 큰 지지를 받게 되었지만, 이 교수의 주장은 신묘년조 기사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이 기사를 제대로 해석하게 하는 중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능비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는 마멸과 훼손이 심하여 정확히 판독하기 어려운 사례가 상당하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비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된다.

앞쪽에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주몽)의 성스러운 탄생과 그 이후의 왕계(王系)가 간략히 기록되었다. 이어 광개토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와 세상을 뜬 연월일, 그리고 그가 관여한 전쟁 가운데 특기할 만한 내용이 시기별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396년에 벌어진 백제와의 전쟁, 400년 신라를 구원하여 백제·가야·왜 연합군과 벌인 전쟁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다. 마지막 단락에는 수묘인(守墓人·묘지기) 관련 규정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 중 수묘인(守墓人·묘지기) 관련 규정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부분. ‘내가 죽거든 내가 몸소 잡아 온 한(韓)과 예(穢) 사람들을 데려다 무덤을 지키고 청소하게 하라’는 광개토왕의 지시가 담겨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수묘인 단락에 광개토왕의 유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몇 가지 지시가 인용되어 있다. 즉, 그는 ‘선대의 왕들께서는 오래전 고구려에 편입된 백성들만 데려다 묘지기를 시켰는데, 나는 그들이 피폐해질까 염려된다. 내가 죽거든 내가 몸소 잡아 온 한(韓)과 예(穢) 사람들을 데려다 무덤을 지키고 청소하게 하라!’ 그리고 ‘옛 왕들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서 뒤섞이지 않도록 하고, 묘지기는 함부로 매매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수왕은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한과 예 사람 220가구를 수묘인으로 지정했다가 그들이 수묘 방법을 모를까 염려된다고 하면서 옛 백성 중에서도 110가구를 더 뽑아 수묘인을 모두 330가구로 확대했다. 이 기록들은 당시 고구려 왕들이 무덤의 보호와 관리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고구려 왕들의 소원은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광개토왕은 고구려 제국이 영원하리라 확신하며 눈을 감았을 것이지만, 그의 사후 255년 만에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 패망하는 신세가 되었고 그와 함께 광개토왕의 안식도 끝나버렸다.

광개토왕릉, 태왕릉일까 장군총일까

광개토왕릉으로 지목된 태왕릉. 광개토왕릉비에서 360m 떨어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게다가 왕릉의 위치마저 실전(失傳)되었는데, 학계에서는 능비에서 360m 떨어진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지목하기도 하고, 그와 달리 2km가량 떨어진 장군총을 유력한 후보로 들기도 한다. 전자는 그곳에서 ‘태왕릉’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전돌이 다수 발견된 점을 근거로 든다.

후자는 2003년 태왕릉에서 신묘년에 제작된 청동방울이 출토된 점을 근거로 삼는다. 즉, 청동방울이 만들어진 해에 고국양왕이 세상을 떴으므로 태왕릉이 곧 고국양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견해와 달리 중국 학계에서는 신묘년에 청동방울이 만들어진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해에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태왕릉설을 견지하고 있다.

이처럼 능비가 재발견되면서 촉발된 광개토왕에 관한 학술적 연구는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치열하게 진행됐다. 그 사이 비문 변조를 둘러싼 연구는 거의 매듭지어졌지만, 능비 비문에 대한 정치한 해석, 수묘 제도와 관련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더 한층 세밀한 연구와 토론을 통해 광개토왕 관련 유적과 유물에 숨겨진 고구려사 해명의 비밀 코드가 찾아지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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