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황상무의 안이한 `오프 더 레코드`

김미경 2024. 3. 1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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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정치정책부 차장

설화(舌禍)의 연속이다. 과거에 내뱉은 말 몇마디로 몇년을 공들여 얻어낸 공천권을 잃은 정치인이 여야를 막론하고 쏟아지고 있다.

국민의힘의 도태우 대구 중남 후보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폄훼 발언'으로, 장예찬 부산 수영 후보는 여러 건의 혐오성 발언 등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아 공천이 취소됐다. 더불어민주당은 '목발 경품' 발언과 '거짓 사과' 논란을 불러온 정봉주 서울 강북을 후보의 공천을 취소했다. 4·10 총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여론의 눈치를 보며 며칠 미적대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공천 취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나마 정치권의 결단은 빠른 편이다. 대통령실발(發) 설화를 대하는 대통령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황상무 시민사회수석이 몇몇 대통령실 출입사와 오찬을 한 자리에서 대통령실과 마찰을 빚었던 MBC를 콕 짚어 "잘 들으라"고 한 뒤 과거 '회칼 테러' 사건을 언급했다고 한다. MBC는 지난 14일 황 수석이 오찬 자리에서 "내가 (군) 정보사 나왔는데, 1988년 경제신문 기자가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 허벅지에 칼 두 방을 찔렸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황 수석이 말한 테러 사건은 노태우 정권 초기인 1988년 '중앙경제' 사회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고(故) 오홍근 기자가 '월간중앙' 8월호에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칼럼을 게재한 뒤 군 비판에 앙심을 품은 정보사령부(정보사) 소속 군인 4명에게 테러를 당한 사건이다. 황 수석의 발언은 직접적이진 않지만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향한 강한 보복 등을 암시하는 듯한 뉘앙스여서 상당한 논란을 불렀다.

언론계와 유족들은 반발했다. 정치권도 황 수석의 해임과 자진사퇴를 요구했다. 방송기자연합회·한국영상기자협회·한국PD연합회는 15일 공동성명을 내고 "방송기자 출신으로서 황 수석 말의 무게와 중함을 여전히 두려워한다면 자신의 발언에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고 했고, 한국기자협회도 이날 "황 수석은 석고대죄해야 한다. 대통령실의 해임을 기다리지 말고 즉각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야당뿐 아니라 여당도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황 수석의 발언은 부적절했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발언"이라며 "본인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안팎에서 황 수석의 발언을 문제 삼자 황 수석이 직접 사과문을 냈다. 황 수석은 지난 16일 "저의 언행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사과드린다"며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다. 언론인 여러분께 사과드린다"고 했다. 이어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 여러분께도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며 "앞으로는 공직자로서 언행을 각별히 조심하고, 더 책임있게 처신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황 수석 논란에 '진노'하면서 '입조심 하라'고 경계령을 내렸다고 한다. 대통령실은 18일 입장문을 내고 "우리 정부는 과거 정권들과 같이 정보기관을 동원해 언론인을 사찰하거나 국세청을 동원해 언론사 세무사찰을 벌인 적도 없고, 그럴 의사나 시스템도 없다. 특히 대통령실은 특정 현안과 관련해 언론사 관계자를 상대로 어떤 강압 내지 압력도 행사해 본 적이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언론의 자유와 언론기관의 책임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국정철학"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의 입장을 찬찬히 뜯어보면 언론을 상대로 강압 또는 압력을 행사한 일이 없고,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철저하게 존중한다는 게 핵심이다. 결국 황 수석의 발언은 언론에 어떤 부적절한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었고, 언론은 자유를 누리는 만큼 책임도 중요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황 수석 발언이 언론에 보도된 뒤 대통령실 내에서는 '오프 더 레코드', 즉 비보도를 전제로 하는 점심 식사에서 나온 발언을 보도한 것에 대한 불만 기류가 읽힌다. 여권 내에서도 황 수석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에는 적잖이 불편해 하는 기색도 있다. 황 수석의 거취 문제에는 입을 꾹 닫았다.

'오프 더 레코드'는 언론계의 관행이다. 조금 더 내부 정보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기자와 취재원 간에 암묵적으로 정해진 규칙이다. 보통 비공식적인 점심이나 저녁자리가 대부분 비보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은 아니다. 공직자가 언론을 상대로 부적절한 발언을 하거나 부적절한 인식을 드러냈을 때 기자는 비보도 전제라는 관행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기자의 의무를 우선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황 수석 발언과 비슷한 사례가 과거에도 있었다. 2016년 7월 교육부 당시 나향욱 정책기획관이 신문사 기자들과의 저녁자리에서 신분제를 옹호하고, 민중을 '개·돼지'로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가 언론에 보도돼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황 수석의 발언은 발언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있으나 특정언론을 겨냥해 "잘 들으라"고 한 것도 매우 부적절했다. 더욱이 황 수석은 언론인 출신 아닌가.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는 비록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라도 가볍게 듣고 넘길 수 없는 이유는 그 '말'의 무게 때문이다. 정치학 박사인 박상훈 국회 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자신의 저서 '정치적 말의 힘'에서 "말이 덕성을 갖추지 못하면 인간의 정치언어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과 황 수석의 결단을 국민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the13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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