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옆자리에 앉자…보수언론 ‘왕특보’ 공격

한겨레 2024. 3. 1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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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58화 실장에서 위원장으로
2004년 8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첫 국정과제조정회의에서 국정과제 추진 조직·기구간 상호협력 방안을 결정했다. 노 대통령은 “각 위원회와 부처, 청와대 정책실이 유기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갖고 협력함으로써 기획이나 집행에서 효율성을 높이고 국정과제 추진에 속도를 더 내주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 아울러 “정책기획위원회가 전문가와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이나 거버넌스의 변화라든가 사회변화에 따른 선진적 민주주의 혹은 정치문화의 변화방향 등을 연구개발하고 제시하는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나는 청와대에서 2년 반 일하던 중 두 차례 청와대를 떠났다. 첫 번째는 2004년 1월 정책실장에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바뀌면서 사무실도 외교부 청사로 옮겼다. 두 번째는 2005년 7월 정책기획위원장을 그만 두고 대구로 내려간 것이다. 내가 청와대를 떠난 데는 재벌, 관료와의 불화가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2003년 5월23일(금) 대통령과 독대 중 노 대통령이 “이 실장은 다 좋은데 관료들과의 관계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당시 나를 따라다니는 나쁜 소문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재벌들이 이정우 때문에 투자를 안 한다’는 것인데 이건 말도 안 되는 과장이요 음해였다. 또 하나가 ‘이정우는 관료들과 사이가 안 좋아 일 추진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답했다. “저는 관료들 중 사무관, 과장들하고는 잘 맞지만 실국장 이상 고위 관료 중 안 맞는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관료들은 젊을 때는 개혁적인데 나이 들고 직위가 올라갈수록 급격히 보수화하는 경향이 있어 그렇습니다.”

2003년 연말이 되자 정책실장 교체 소문이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했다. 12월22일(월) 오후 3시 김병준 정부혁신위원장이 찾아왔다. 언론 보도(정책실장 교체)가 맞다고 하면서 어차피 똑같은 일을 하니까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하라고 권했다. 나는 그만두겠다고 답했다. 내일 저녁 관저 만찬에 이종오 정책기획위원장, 김병준과 내가 참석키로 되어 있다고 하기에 “내일은 내가 할 말을 다 하겠으니 김 위원장도 옆에서 거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위원장이 떠난 뒤 내 거취 문제를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정책실에서 일하는 정태인, 김수현, 정동수, 한태선, 그리고 경북대의 김민남, 김형기 교수 모두 반대했다. 차라리 그만두고 대구에 내려가는 게 맞다고 한다. 내 생각과 일치했다. 그만 둘 결심을 굳혔다.

12월23일(화) 오후 3시 국무회의(세종실). 윤덕홍 교육부 장관의 국무회의 참석이 마지막이라서 악수하고 위로했더니 윤 장관은 그동안 고생만 하고 평가를 제대로 못받아 억울하다고 말했다. 법령 통과시킬 게 수십개여서 엄청나게 긴 시간이 소요됐다. 노 대통령이 회의 끝나고도 이것저것 작은 일까지 일일이 언급하고 지시해서 좀 걱정스러웠다. 최근에 말이 많아진 것과 작은 일까지 신경 쓰는 것, 둘 다 좋지 않은 조짐이었다.

국무회의를 마치고 헐레벌떡 관저로 달려가니 오후 6시32분, 2분 지각이었다. 인수위와 청와대 근무를 통틀어 첫 지각이다. 대통령이 이미 응접실에 나와서 이종오, 김병준과 대화중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니 노 대통령이 웃으며 “이 정도는 지각도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만두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재산세 인상안, 특별교부세 등 최근 국회 상정 안건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노 대통령이 이종오 정책기획위원장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 대신 다른 자리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이종오 위원장은 전혀 개의치 마시라고 웃으며 흔쾌히 사의를 표명했다.

이어서 노 대통령이 나를 보고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정책실장이 너무 과부하가 걸려 가끔 시킬 일이 있어도 말하려다가 못한 적이 많았다. 현안은 관료들에게 맡기고 장기 국정과제는 위원장에게 업무를 맡기려 한다. 처음에는 이 실장이 일 처리가 느려 답답했는데 지금은 잘 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로 옮겨 계속 맡아주면 좋겠다.” 내가 답했다. “이종오 위원장하고는 친구 사이라 인간적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그것보다 청와대 새 구도가 문제입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국정과제가 정책실에서 정책기획위원회로 가면 동력이 떨어질 겁니다. 부동산 대책이나 교육혁신위에 대한 공무원들의 협조 태도가 당장 달라질 겁니다. 둘째, 관료들이 정책실을 장악하면 일은 잘하지만 근본적 문제 해결 대신 편법으로 덮고 지나갈 우려가 있는데 그걸 막으려면 학자 출신이 정책실장을 맡는 게 맞습니다.”

노 대통령이 말했다. “관료들은 노를 잘 젓는 사람들인데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정책기획위원장은 대통령과 같이 키를 잡고 가는 사람이다.” “주위의 믿을만한 사람들하고 의논해봤는데 모두 한결같이 그만두고 대구 내려가는 게 맞다고 합니다.” “대통령하고 의논해야지 왜 엉뚱한 사람들하고 의논하느냐?” “저를 위원회로 옮길 계획을 어제 처음 들었습니다. 오늘 여기 오기 전 마음을 정해야 할 것 같아서 어제, 오늘 몇 사람과 의논해봤습니다.” “이 실장이 새 구도를 반대하기 때문에 의논하지 않았다.”

이종오, 김병준 두 위원장의 설득과 같이 키를 잡고 가자는 대통령의 엄청난 말에 결국 내가 설득당했다. “대통령이 그 정도로 생각하신다니 더는 반대를 못하겠고 맡아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책기획위원회에 힘을 실어주십시오. 또 하나는 현안에 대해서 관료들이 적당히 덮고 지나가는 경우 위원장이 수시로 보고하게 해주십시오.” “좋다. 위원장이 수석회의 기타 원하는 모든 회의에 참석하도록 하겠다. 후임 정책실장한테도 위원장을 각별히 잘 모시라고 지시하겠다. 관료들이 잘못하면 언제든 보고하고 누구누구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하면 다 하겠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김병준 위원장이 “이종오 위원장하고 친구 사이라서 미안하다는 얘기는 이해가 가지만 그건 작은 문제”라고 하니 이종오 위원장이 “나는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다. 내가 “이종오, 박봉흠하고 셋이 대학 동기라서 일이 공교롭게 되었습니다”하니 “아 그렇습니까?”하고는 대통령은 8시30분쯤 일어섰다. “단,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합니다” 하고 방을 나가면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이 천상 장난꾸러기 같고 권위주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1월19일 오전 청와대 집무실에서 이정우 정책실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12월30일(화) 내가 수석회의, 국무회의에 계속 참석하는데 민간인 신분이라서 좀 문제가 있겠다고 하니 노 대통령이 정책특보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오후 6시 영빈관에서 열린 장·차관 송년모임에 부부동반 250명이 참석해 대통령 내외와 일일이 악수하고 인사했다. 처음 시도하는 송년회 양식이라는데 괜찮아 보였다. 내 차례가 되자 노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이구동성으로 “1년 동안 고생 많이 했습니다”라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다. 이날 동아일보 고기정 기자가 ‘현실경제 벽은 높았다’는 제목으로 문민정부의 박재윤, 국민의정부의 김태동, 참여정부의 이정우를 비교하는 기사를 썼다. 학자 출신이 정부에 들어오면 반드시 실패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희망사항을 사실인 것처럼 써놓아 동의하기 어려웠다.

2004년 1월2일 노무현 대통령이 이정우 신임 정책기획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며 격려의 악수를 나누고 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4년 1월2일(금) 오전 9시. 김병일 기획예산처 장관, 박봉흠 정책실장과 함께 내가 정책기획위원장 임명장을 받은 뒤 차 한잔을 했다. 대통령이 수석회의 자리 배치 이야기를 꺼냈다. “밑에서 고민하기에 내가 그냥 앉던 자리에 그대로 앉으라고 정했다. 대통령 자문위원장이니 예우를 해드리는 게 맞지 않겠나. 박 실장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박봉흠 실장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선선히 양보했다. 그래서 나는 수석회의에서 원래 앉던 자리(대통령 왼쪽)에 그대로 앉게 됐다. 하던 일도 그대로, 자리도 그대로,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도 언론은 내가 밀려난 것처럼, 학자가 관료한테 밀린 것처럼 쓰기를 즐겼다. 동아일보 최영해 기자는 왕특보, 위인설관이라고 비판했고, 매일경제신문은 이정우 청와대 자리 배치가 기형적이라고 공격했다. 반면 한국경제신문 허원순 기자는 ‘예우받는 정책특보’라고 점잖게 썼다. 나는 원래대로 12개 대통령 자문위원회를 총괄하며 국정과제 회의를 진행했다. 노 대통령은 밑에서 다 결정된 것을 최종 추인하는 국무회의를 총리에게 맡기고 장기 결석하는 한편, 토론이 있는 국정과제 회의를 좋아해 64회나 참석해 중요한 결정을 해나갔다. 동북아 경제중심, 균형발전, 신행정수도, 전자정부, 정부혁신, 보육 확대, 아동빈곤 해소, 근로장려세제 등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들이 모두 여기서 결정되고 실행에 옮겨졌다. 바야흐로 위원회의 전성시대였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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