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41>] 혼돈의 경제학

2024. 3. 1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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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올드 베일리. 사진 셔터스톡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당신이 내게 3파딩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세인트 마틴의 종소리가 말해주겠죠. 당신이 언제쯤 그 빚을 내게 갚을지, 올드 베일리의 종소리가 알려주겠죠”라는 심상찮은 구절이 나온다. 20세기 이전까지 올드 베일리는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형사재판소였다. 그 때문인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와 ‘저스티스 리그’는 테러범들이 올드 베일리를 폭파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런던의 처형장

1690년 10월 15일 토머스 로저스와 앤 로저스는 은화 40개의 가장자리를 잘라낸 혐의로 올드 베일리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들은 끔찍한 범죄(주화 훼손)를 저지른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지만,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줄칼과 함석가위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법원은 즉시 유죄판결을 내렸다. “토머스 로저스를 마차 뒤에 묶고 처형장으로 끌고 가서, 나무에 목을 매단 다음, 산 채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어 불태우고, 몸은 4등분해서 버리도록 하라”는 국왕의 집행명령이 내려졌다. 여성의 신체를 공개적으로 절단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꺼렸기 때문에 앤은 단순히 산 채로 불태워졌다. 당시에는 토머스와 앤의 끔찍한 운명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1674년부터 1700년까지 25년 동안 525명이 화폐 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부도덕한 은행가와 상인들은 순은으로 만든 주화(크라운·실링)의 가장자리를 잘라내고 녹여서 은괴를 만든 다음 국외로 밀반출했고, 훼손돼 가치가 낮아진 주화의 몸통은 원래 가치(명목가액)대로 시중에서 유통됐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들은 국왕의 금고에서 은괴를 빼돌리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를 단순히 절도범으로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더 깊은 불안이 작용했다. 올드 베일리의 판사들은 주화를 깎고 변조하는 행위를 절도가 아니라 반역으로 보았다. 문제의 본질은 이들이 단순히 왕관을 훔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권의 위엄과 정통성을 침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화폐에 고정된 국왕의 권위를 뒤흔들었고, 그로 인해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한 것이다. 멀리서 보면, 이런 주화 훼손 행위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닮아 있다.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이 손해를 보지만 누군가는 이익을 얻는다. 오늘날의 중앙은행 직원들이 17세기에 태어났더라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했을 것이다.

아노미와 엔트로피

그 당시 영국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진 동전 깎기로 인해 주화는 앞면에 찍힌 가치(명목가치)보다 적은 양의 은(소재 가치)을 함유하고 있었다. 재무장관인 윌리엄 로운즈는 의회에 출석해 유통되는 화폐의 귀금속 함량이 명목가액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정부의 물타기 작전에 따라 온전한 주화(양화)와 심하게 훼손된 불량 주화(악화)가 함께 유통됐지만,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그레셤의법칙). 주화는 액면가가 아니라 무게로 평가됐다. 부유한 상인들은 장거리 무역을 위해 좋은 주화를 쌓아 두었고, 잘린 동전을 사용해 임금을 지불하거나 일상적 거래를 수행했다. 언제나 불공정은 약자의 몫이니까. 윌리엄 3세가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모험을 감행함에 따라 통화의 불안정성이 더욱 커졌다. 영국군은 대륙에서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스털링(주화)을 환어음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주화의 가치가 낮아지고, 은 수출에 대한 인센티브가 커졌다. 주화의 국내 유통량이 많아지고, 은의 해외 가치가 국내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스털링의 가치가 폭락했고, 사람들은 스털링이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교환 매체의 역할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로크는 이런 상황을 인식론적 위기로 받아들였다. 주화 깎아내기는 불확실성과 혼란을 증폭시켰고 유통되는 화폐(주화)의 권위를 약화했다. 경제주체들 사이에서 신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신뢰할 만한 통화가 없다면 개인이 계약을 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신뢰할 만한 화폐가 없다면 경제주체들은 자신들이 의도한 교환 조건으로 거래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동전 깎기는 공통 화폐를 훼손함으로써 사회 내 개인 간 안정적인 상호작용을 위협했다. 역사가 토머스 맥컬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나쁜 왕, 나쁜 장관, 나쁜 의회, 나쁜 판사들이 영국 국민에게 끼친 모든 비참함보다 지난 1년 동안 나쁜 왕관(주화)이 영국 국민에게 끼친 해악이 훨씬 더 크다. 쫓겨난 국왕인 찰스와 제임스의 잘못된 정부도 정직하고 성실한 가족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위대한 교환 도구(주화)가 완전한 혼란에 빠지자, 모든 무역, 모든 산업이 마비된 것처럼 불구가 됐다. 악은 거의 모든 장소와 거의 모든 계층, 낙농장과 타작마당, 모루와 베틀, 바다의 파도와 광산의 굴 속에서 매시간 느껴졌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슘페터의 의문

1690년대 로크와 동시대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경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들에게 주화는 단순한 경제적 거래 메커니즘 이상의 무엇인가를 상징했다. 돈은 상징적이고 통일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교환 매체가 아니라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따라서 크라운(은화)의 붕괴는 사회적 신뢰의 붕괴를 의미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크의 고민은 깊어졌고 통화 위기에 대한 로크의 대응은 심각했다. 존 로크는 공동 통화를 훼손하는 사람들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통화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재무장관이 은 함량을 낮춰 통화를 안정시키자고 제안했을 때 로크는 이를 거부했다. 로크는 주화가 은 함량이라는 ‘내재적 가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반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주화의 ‘자연적 가치’를 포기한다면, 사람들이 자국 통화에 대해 갖고 있는 신뢰를 포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통화의 무게를 유지함으로써 통화의 가치와 신뢰를 보장해야 한다는 로크의 끈질긴 주장은 결국 1696년의 대주조(Great Recoinage), 즉 구화폐의 폐지와 신화폐의 유통으로 이어졌다.

비록 로크가 논쟁에서 승리했지만, 그의 입장은 현대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로크가 ‘돈은 단순한 기호이고, 기호는 자연적 가치가 아닌 관습적 가치를 지닌다’는 종전의 입장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로크는 유독 화폐 문제에서만 기호(sign)와 대상(reference) 사이에 정확한 일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로크가 ‘인간 오성론’을 통해 발전시킨 언어적 관습주의와 모순된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이미 수십 년 동안 관습적으로 저중량 주화가 유통돼 왔기 때문이다. 조지프 슘페터는 로크의 경제적 저술이 “그의 철학이나 정치 이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고, 조이스 애플비는 “경험주의적 사고 체계 내에서 물질이 정신에 패배한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일단의 경제학자들은 로크를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다소 혼란스러운 경제학자”라고 묘사했다.

데자뷔

최근 수십 년 동안 현대인은 로크가 ‘화폐의 상상적 가치(phantastical imaginary val-ue of money)’라고 불렀던 것의 극심한 변동성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소유한 물건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관습은 신기루처럼 보인다. 저금리가 장기화하자 비트(bit)가 황금이 되기도 하고, 거품이 터지자 천문학적인 자산 가치가 증발해 버린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아우성과 비명이 계속되고 있다. 명확한 측정 기준이 없다면 우리가 받아들인 관습, 즉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화폐와 신용이 어떻게 사익과 공익을 증진시키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과연 로크는 자신의 논리적 모순을 몰랐을까.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안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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