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섞고 죄고 풀고...글씨 수련이 빚은 현대 한국화

읽는 그림이 아니다. 보이는 그림이다.
더욱 드세고 강렬하게 이땅 곳곳의 산수풍경과 문화유산들의 이미지를 드러내어야 한다는 화두를 붙들었다. 그렇게 50여년간 사생 작업을 거듭해온 박대성(79) 작가는 ‘그림꾼’이란 말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현대 한국화의 최고 장인이 됐다. ‘문자향 서권기’라는 고담준론에 매몰되지 않는다. 사생에 바탕한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재현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필획의 글자 수련을 거듭해온 내공으로 똘똘 뭉쳐진 화가다. 그는 이제 자유자재로 이땅 산하의 진경을 압축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꾸려서 펼쳐놓는 경지에 이르렀다.
“인간이라면 글씨를 써야 합니다. 평생 호미를 잡고 살더라도, 배추장사를 하더라도 글씨를 쓰라는 중국 속담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사람다운 것은 글씨 쓰기라는 인식이 생긴 겁니다. 글씨 쓰는 붓은 선비만 붙잡는 게 아닙니다.”
지난 7일 그의 개인전 ‘소산비경(小山祕境)’이 열리고 있는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2층에서 만난 작가는 옛 글씨의 가치를 설파하는 전도사 같았다. 출품작들을 설명하기에 앞서 지금도 매일같이 매진하는 글씨 쓰기야말로 인간과 예술의 뼈대임을 힘주어 이야기했다. 지난 40여년간 광맥을 찾듯 한국과 중국의 옛 글씨본 법첩을 수집했고, 그렇게 모은 방대한 글씨자료들을 검토하면서 날마다 다른 생각과 감성으로 쓴 것이 자유자재로 필획을 구사하며 이 땅의 산수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역량을 만들어냈다고 털어놓았다. “법첩의 옛 글씨들은 매번 옮겨 쓸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나오는 필치도 달라요. 나 자신부터 날마다 다르거든. 그 다름의 맛 덕분에 세상 지겹지 않게 사는 거지.”
지난달 2일부터 시작한 이 전시는 일종의 보고전이다. 지난 2년 동안 카자흐, 독일, 이탈리아, 미국의 여덟개 기관에서 특유의 진경 산수 대표작들을 선보인 순회전 대장정을 마치고 성과를 국내에 알리는 자리다. 미국 서부의 엘에이 카운티 뮤지엄(라크마) 개인전과 미국 동부 하버드대 한국학 센터와 다트머스대 후드미술관, 뉴욕 주립대 스토니브룩 찰스왕센터, 메리워싱턴대의 전시 출품작과 최근 완성한 신작들로 1, 2층을 채웠다. 유명한 대표작인 ‘불국설경’ 연작의 새해 신작은 귀국한 뒤 다시 그려 연초에 완성했다. 금강산 연봉 암벽이 벽력 같이 솟아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 한 풍경을 상상한 ‘현율’과 국립민속박물관 기와탑이 보이는 경복궁 동쪽 돌담길과 그 앞 까치 앉은 가로수를 그린 도시 실경화도 눈을 잡아끈다.

박 작가는 치열한 글씨 수련에 기본을 두고 ‘강약’과 ‘연출’이란 두가지 열쇳말로 현대 한국의 산하 진경을 내키는 대로 풀어내고 집약한다. 벅벅 긋거나 힘껏 훑어낸 흔적이 여실한 질감 표현의 활력을 통해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와 전각 석축, 금강산 기암 준봉의 암벽 표면을 현장에서 보듯이 묘사했다. 겸재가 그랬듯 마른 먹과 짙은 먹을 섞어 섬세하거나 거친 선묘로 죄었다가 풀어내어 풍경의 박진감을 증폭시킨다. 경주 남산골 연작에서 극명히 나타나듯 마애불과 석탑, 동종 등 문화유산 명작의 소재들을 이땅 여기저기 공간에서 따와서 화폭에 몰아놓고 재구성해 나름의 그림 무대를 만든다. 경주에서 30년 생활하면서 이렇게 창안한 상상 속 진경그림의 대표작들이 거대한 보름달이 두둥실 뜬 작업실 앞 풍경 대작인 ‘삼릉비경’(2017)과 경주의 신라유산들이 이파리 같은 산세 속에 도열한 ‘신라몽유도’(2022)다. 선 긋기 수련이나 풍경의 경물을 자신의 의식 속에 재구성하는 훈련을 집요하게 해야 가능한 박대성류의 작품들로 이 전시의 주요 수작들로 꼽힌다.
작은 경물부터 대관 산수까지 명쾌하고 집약된 이미지를 강조하는 작업 스타일은 여전한데, 출품된 신작들은 경물의 선을 그리는 필치가 한결 대범하고 거칠어졌다. 나이와 형상에 더욱 구애받지 않으려는 의지가 와 닿는다. 이런 맥락에서 2층 안쪽의 중심작품인 ‘불국설경’ 신작 세부를 주목해봐야 한다. 불국사 주변 소나무 숲을 깔깔한 질감으로 묘사한 그림 한쪽 끝에는 뒤집혀 거꾸로 보이는 경판 한자들의 문장이 보인다. 정작 문장 내용은 그림 속 절 풍경과 아무 상관이 없다. 절집의 고아한 분위기를 돋우려고 뒤집힌 글자의 고풍스러운 이미지 자체만을 강조한 특유의 연출이란 점에서 더욱 치열해진 작가의 조형의식을 실감하게 된다. 24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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