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반도체 공급망 재편, 인구 증가·넓은 땅·IT 수요 3박자 갖춰”
반도체 산업 재건 위해 뛰는 미 정부·학계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의지는 강력해 보이지만, 반도체 업계 내에선 미국 내 첨단 반도체 제조시설이 지속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다. 반도체 팹(공장)은 안정된 전력과 물이 공급되어야 하며, 인적 자원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팹을 운영하는 데 동아시아보다 높은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를 지원하기 위한 보조금 지급은 2026년까지로 제한돼 있다.
그러나 한겨레가 지난 2월 찾은 미 애리조나주의 반도체 투자·교육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싸고 넓은 땅이 있고 인구가 많아, 부족한 점을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냉전 시기 소련이 우주에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올리자 큰 충격을 받았고, 외국의 고급 인력을 받아들이고 교육을 바꾸는 등 혁신을 통해 달에 사람을 먼저 착륙시키는 경쟁에선 승리했다. ‘스푸트니크 효과’는 미-중 대결로 옮겨온 2024년 반도체 분야에서 재연되고 있을까. 미국의 학계와 지역사회를 찾았다.
■ 넓은 땅·칩 수요·세제 혜택 ‘삼박자’
“넓은 땅과 탄탄한 반도체 생태계가 있는 애리조나뿐 아니라 강력한 세제 혜택이 있는 텍사스, 실리콘밸리의 유능한 인재 유입이 가능한 오리건주 등 미국 전체가 반도체 공장 유치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지난달 22일(현지시각) 애리조나 피닉스 ‘그레이터 피닉스 경제위원회’(GPEC) 사무실에서 만난 토머스 메이너드 그레이터 피닉스 경제위원회 부사장은 미국 지역 주들의 반도체 기업 유치 상황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피닉스 경제위원회는 비영리 경제 개발 지원 단체로 해외 기업 투자를 유치하고 현지 경영 등을 지원하는 업무를 한다. 대만의 티에스엠시(TSMC) 유치 과정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메이너드 부사장은 어떻게 애리조나주가 티에스엠시와 인텔의 최첨단 팹을 동시에 유치했는지 설명하며 “미국의 많은 주가 글로벌 반도체 공장을 유치할 각자 매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애리조나는 1950년대 말부터 모토롤라 반도체 제조 공장이 들어섰고, 80년대 이후 인텔이 들어오면서 미국에서 손에 꼽히는 탄탄한 반도체 생태계가 조성됐다. 미국 최대 원전 단지가 인근에 있고, 사막 기후로 태풍이나 토네이도, 지진 등이 없어 자연재해에 민감한 반도체 공장을 짓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 전역엔 상대적으로 넓고 싼 땅이 있고,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배출한 전문 인력과 남미의 저렴한 노동력도 유입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각자 주들의 각각 인센티브를 가지고 많은 반도체 투자자를 유혹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계획이 성공할지 묻자 메이너드 부사장은 “더 많은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과 애리조나에 투자를 검토하고 있어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 근거로는 ‘투자의 삼박자’를 제시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외부 유입 등으로 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 공장을 지을 수 있는 광활할 땅이 있고, 무엇보다도 반도체 칩을 사줄 많은 정보통신(IT) 기업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에서 생겨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탄생한 애플과 엔비디아, 에이엠디(AMD) 같은 대형 고객들이 계속 존재하는 한 미국의 반도체 생산망도 더 강화될 것이다.”
■ “미국은 전세계 반도체 인력 흡수할 강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SU) 공과대학 내 클린룸(NanoFab)은 실제 반도체 공장을 옮겨 놓은 듯했다. 반도체 기판을 단파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노란빛으로 가득 찬 353㎡ 규모 클린룸엔 반도체 소자를 분석하는 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이클 코지키 전기컴퓨터에너지공학부 선임교수는 2월22일 피닉스 템피 캠퍼스의 ‘반도체 연구센터’를 함께 둘러보며 미 정부의 ‘반도체 지원법’ 제정을 계기로 반도체 제조 및 패키징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이날 센터에선 수십명의 학부·대학원생들이 웨이퍼 소재인 실리콘 가공부터 분자 및 생체 전자공학, 미세 전자 기계 시스템 등의 다양한 전문 공학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이 센터는 반도체 지원법 제정을 계기로 인력 양성이 중요해지면서 정부 지원금과 기업 파트너십 투자 등으로 확장한 시설이다.
인텔과 티에스엠시 팹이 동시에 생겨 제조 전문 인력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란 우려에 대해 코지키 교수는 “단기적으로 부족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인력 부족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최근 미국에 새 반도체 공장 건설로 2030년까지 약 11만5천개의 반도체 관련 일자리가 만들어지지만 학위 수여율을 고려할 때 절반가량인 6만7천개가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그는 “몇년 전까지도 반도체 제조는 노동력이 싼 동아시아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코로나19 시기 반도체 부족을 겪고 인공지능 시대에 첨단 반도체 제조와 고급 패키징 기술이 진화하면서 미국 사회와 대학에서도 자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졌다”고 했다. 그는 애리조나주립대 공과대 학생 수만 4만여명(대학원생 포함), 전체 학생 수는 14만명이란 점을 언급하며 “미국 각 주에는 유능한 반도체 전문 인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들이 있어서 정부 지원과 대학 투자가 지속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반도체 전문가 양성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연구센터에서 만난 인도 출신 대학원생 스미타 스와인은 “지역에 티에스엠시 공장이 지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입사를 고민하는 대학원생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 “‘프렌드 쇼어링’으로 반도체 공급망 재편”
리슬 포크스 ‘애리조나 반도체 교육센터’ 부학장은 미국 반도체 제조업 육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전 교육과정을 아우르는 반도체 교육”이라고 했다. “미국 반도체 지원법이 국내외 2500억달러 규모의 기업 투자를 끌어낸 만큼 지속가능한 미국 내 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위해 체계적인 반도체 인력 교육의 중요성이 커졌다”며 센터 설립 목적을 설명했다.
미국 반도체 교육 ‘컨트롤타워’로 불리는 반도체 교육센터의 포크스 부학장을 지난달 23일 투산의 애리조나대학교에서 만났다. 애리조나 센터는 ‘반도체 지원법’ 제정 뒤 애리조나 상무청으로부터 1300만달러(약 172억원) 지원을 받아 설립됐다. 대학 내 클린룸 시설 확장뿐 아니라 지역 내 직업교육대학과 고등학교의 반도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한 큰 판을 짜는 역할을 한다. 텍사스와 뉴욕 등 주요 지역에도 센터가 있다.
포크스 부학장은 센터가 단순히 취업 인력을 교육하는 목적을 넘어서 중·고등학교 반도체 소양교육 등 전 교육과정을 아우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역에 대형 패키징 공장이 들어선다면 우선 기업 요구를 반영해 패키징 전문 인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부터 센터 역할이 시작된다. 직업대학 교육을 이수한 제조 인력일 수도 있고, 대학 석박사를 거친 전문가가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에 인력 공급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반도체 관련 기본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중·고등학교의 물리학 교육이나 전문 교사를 지원하는 등 전 교육과정에 관여한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한국, 대만과 달리 지속적인 미국 인구 증가 흐름이 중장기적으로 반도체 제조업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인구가 늘고 있고, 필요에 따라 중남미의 노동력을 유입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반도체 제조 공장의 첨단화와 자동화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만큼 길게 보면 동아시아 공장과 비교해 미국 공장 운영 비용이 크지만은 않다.”
포크스 부학장은 티에스엠시와 삼성전자의 미국 공장 건설을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으로 지칭하며 “미국과 해당 기업이 속한 국가 모두 반도체 생산망이 더 안정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프렌드 쇼어링은 동맹·우방국끼리 반도체 생산망을 구축해 글로벌 공급망 교란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의 미국 중심 재편 전략이다.
피닉스·투산(애리조나주)/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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