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공사비 '갑을 다툼'…정부 중재인들 먹힐까
서울시, 공사비 검증결과 의무 반영 추진
'물가변동배제특약' 불구…건설사들 "증액 불가피"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장 곳곳에서 급격한 물가상승 후폭풍에 몸살을 앓는 모습이 포착된다.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는 시공사와 이에 반대하는 조합 간 갈등으로 공사 중단이 빚어지는 일도 적잖다. 공사비를 둘러싼 분쟁은 조합뿐만 아니라 대기업, 공공기관이 발주한 사업장에까지 번지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이 같은 공사비 갈등이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도 모니터링을 넘어 현장조사에 착수하며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건설업계에서는 물가상승을 반영한 증액만이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공사를 맡긴 사업주 측은 증액에 난색을 표한다.
서울시, 갈등현장 직접 확인…검증결과 의무 반영 추진
서울시는 최근 공사비 증액 요청으로 시공사와 조합 간 갈등이 발생한 정비사업 8곳에 대한 현장조사를 이달 22일까지 시행한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조합-건설사 '공사비 전쟁'...누가 재건축될 상인가(2월14일)
서울시는 매달 공사비 증액 및 변경계약 현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최근 증액 요청이 들어와 협의를 진행 중인 현장에 직접 나가 갈등을 예방하고 조정·중재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와 자치구 담당자가 전문 코디네이터와 함께 해당 사업장의 공사비 증액 사유와 세부 내역, 협의 진행상황 등을 점검한다.
서울시 주택정책실 관계자는 "언론 보도대로 시공사와 조합 간 갈등이 실존하는지, 정확한 증액사유와 세부내역은 무엇인지 직접 살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다만 현장조사 사실 노출이 공사비 협상에 영향을 주거나 불필요한 내부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만큼 사업장명은 공개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공사비 검증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공사비 검증 완료건수는 2019년 3건에 불과했지만 2022년 32건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30건에 이어 올해도 벌써 3건 이뤄졌다. 검증신청이 접수된 사업장은 훨씬 더 많다는 게 부동산원 설명이다.
부동산원에 이어 서울주택도시공사(SH)도 공사비 검증 사업을 맡았다. 지난달 신반포22차 재건축, 행당7구역 재개발 현장을 시범사업지로 선정한 데 이어 올해 하반기부터 전면 시행한다.
공사비 증액 규모가 당초 계약금액 대비 5~10% 이상인 경우 공사비 검증을 의무로 받아야 한다. 다만 강제성은 없다. 부동산원 관계자는 "공사비 검증 결과 그대로 재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건 아니다"라며 "다만 조합은 검증보고서를 총회에서 공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공사비 과다 증액으로 인한 분쟁을 차단하고자 '공사계약 종합 관리방안'을 시행하겠다고 지난해 3월 발표했다. 아직까지는 공사비 검증 시기나 결과 수용 여부를 자율에 맡기고 있지만 조만간 강제성이 부여될 예정이다.
공사비 검증을 입주 1년 전까지 착수하도록 하는 조합정관 개정, 검증 결과를 반드시 반영토록 하는 표준계약서 개정 등은 올해 상반기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가변동 배제특약' 있지만…근본 대책은 증액?
공사비 증액을 둘러싼 분쟁은 민간 기업과 공공기관에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건설 컨소시엄과 롯데쇼핑은 올해 1월 국토부 건설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에 조정을 신청했다. 양측은 2019년 총 공사비 1380억원에 광주 쌍암동 주상복합신축공사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건설 측은 2022년부터 공사비 상승을 이유로 140억원 인상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롯데쇼핑 측은 물가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을 배제하는 '물가변동 배제특약'을 근거로 거부했다. ▷관련기사: "공사비 이렇게나 올랐다고?"…'물가변동 배제특약' 논란(2023년12월6일)
쌍용건설은 지난해 완공된 경기 판교 KT 신사옥 공사비 증액을 두고 KT와 분쟁 중이다. 2020년 967억원에 도급계약을 체결한 후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171억원의 자금이 초과 투입됐다는 이유다.
지난해 10월 분조위 조정 신청과 함께 KT 판교 사옥 앞에서 시위도 벌였다. 이달 12일엔 KT 광화문 사옥 앞에서 2차 시위를 계획했으나 KT 측의 요청으로 미뤘다.
공공공사 현장에선 공사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세종 공동캠퍼스 건설공사를 수주한 대보건설은 이달 5일 공사를 중단한 바 있다.
대보건설은 계약 당시 공사비는 750억원이었는데 현재 300억원 이상 손실이 예상돼 공사비 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LH는 계약금액 조정은 사후 정산하는 게 원칙이지만 최근 건설업계 상황을 고려해 관련 내용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이후 양측은 협의를 통해 오는 18일부터 공사를 재개하기로 했다.
이 같은 갈등 상황을 국토부도 인지하고 있다. 최근 4년 내 공사비가 20~30% 오르고 금융비용이 2배가량 상승해 건설원가 및 지출이 증가했다고 진단했다. ▷관련기사: 박상우 "공사비 분쟁 재건축에 전문가 파견 계획"(3월8일)
박상우 국토부 장관은 이달 8일 건설업계 간담회에서 "공사비 상승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공공사의 전 단계에 걸쳐 공사비가 불합리하게 책정되는 사항을 살펴보고, 민간공사에 대해서도 전문기관의 조정을 통해 갈등이 해소되도록 적극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정부의 중재가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발주처와 시공사 간 계약에 있어 제3자인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사실상 없어서다. 건설업계는 공사비 갈등을 해소할 근본적인 대책은 '증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서울시가 현장에 모니터링 요원을 파견하고 각종 공문을 보내고 있지만 사실상 효력이 없다. 내부 회의할 때 참고하는 정도"라며 "갈등을 해결하려면 급격한 물가상승을 반영해 공사비를 조정하는 방법뿐"이라고 강조했다.
건설 사업주 입장에서는 사업 손익을 가르는 비용을 추가한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공사비 갈등으로 공사가 늘어지고 준공 지연 등이 발행하면 더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게 고민이다.
한 발주처 관계자는 "물가상승을 고려해 공사비 증액을 검토해볼 순 있지만 공사를 멈추는 건 별개의 문제"라며 "임의로 공사를 중단하면 공기가 연장되고 입주 일정이 밀리는 문제가 생긴다"고 우려했다.
정비사업을 진행 중인 건설사 관계자는 "타워크레인 비용만 해도 하루에 수억원이다. 공사비 협상이 늦어질수록 조합원이 손해"라며 "공사 중단 이후 재착공하려면 그간의 대출이자와 비용까지 얹어 협상해야 해 증액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고준석 연세대 상남경영원 주임교수는 "인건비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 발주자가 돈을 더 낼 거냐, 말 거냐를 선택하는 문제"라며 "바뀐 시장상황을 고려해 현실적으로 증액하고 높은 시공품질을 기대하는 게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수 (jskim@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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