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줌인/임현석]성실 연재하던 초인을 기리며
만화 ‘드래곤볼’ 창작자 도리야마 아키라 작가가 뇌출혈로 일주일 전 별세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8일. 공교롭게도 이날 도리야마의 마지막 메시지가 공개됐다. 일본 도쿄 애니메이션 어워드 페스티벌에서다. 도리야마는 당시 행사에서 공로상을 받았고, 이에 그가 행사 주최 측에 미리 보내 놓은 수상 소감이 그의 만화를 주제로 한 전시 부스에서 공개된 것이다. 별세 소식은 메시지가 공개된 후 알려졌다.
‘애니메이션엔 별로 관심이 없고 부끄럽기도 해서 예전엔 제 작품이 애니메이션화됐을 땐 많이 안 봤습니다. (중략) 젊었을 때 생활 습관 때문인지 건강엔 자신 없는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할 테니 많은 응원 부탁합니다.’
이날 메시지는 만화잡지에 장편 연재하던 만화가 도리야마가 애니메이션 공로상을 받는 데 대한 머쓱함을 밝힌 것이다. 출판 만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엔 관심 없었다던 솔직함. 그러면서도 이날 메시지는 연말로 예정된 드래곤볼 탄생 40주년 기념 애니메이션 ‘드래곤볼 다이마’를 기대해 달라는 내용 또한 담겼다. 원작자로서 조언만 한다는 게 일이 점차 커져서 직접 캐릭터 디자인과 세계관 설정에 참여했다며.
도리야마는 드래곤볼 주요 설정(정신과 시간의 방에 별다른 배경 요소가 없는 점 등)에 대해 ‘그리기 귀찮아서’라고 답했다는 사실 등이 알려져 천재성에 의존하는 작가라는 인상이 매우 강한 편이다. 그러나 공을 들일 대목과 대충 그려도 될 구간을 구분하는 건, 살인적인 연재 일정 가운데서도 단 한 번도 펑크를 내지 않는 비결이었다. 드래곤볼 이후 장편 연재를 하지 않은 건 오랫동안 연속된 작업 과정에서 얻은 심한 건초염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는 휴가를 가기 전에도 미리 연재 분량을 그려놓고 갈 정도로 성실했다.
애니메이션 계약 때문에 만화 연재를 그만두기는커녕 잠시 쉴 수도 없었던 점이 불만이었는 데도, 애니메이션 ‘드래곤볼Z’ 제작 일정에 맞추고자 당시 차기 만화용 에피소드 콘티를 먼저 보내는 등 협조한 편이다. 살인적인 연재 스케줄 속에서도 게임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 일러스트레이터 일도 근면하게 해냈다. 투덜대면서도 할 건 다 하는 유형이었다.
그는 독자와 편집자 요구에 따라 작품 방향을 유연하게 수정했던 면모도 있다. 드래곤볼이 서유기를 본뜬 캐릭터성이 강한 모험물에서 격투물로 전환한 건 편집자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악역 캐릭터가 이전 강자를 뛰어넘으면서 쉴 새 없이 강해지는 데다 결투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을 듣자 최근 애니메이션 들어선 캐릭터성을 더 드러내는 방향(드래곤볼 슈퍼: 슈퍼 히어로)으로 각본 노선을 틀었다. 차기작 드래곤볼 다이마는 손오공을 비롯한 주요 캐릭터들이 어린이로 돌아간다는 설정을 주고 전투의 비중을 더 낮출 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줏대 없이 유연하기만 한 사람이냐면 그건 아니다. 손오공을 성인으로 성장시킨다는 결정은 출판사 반대를 무릅쓰고 도리야마가 내린 결정이었다. 2018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요즘 만화가들이 완성도는 높지만 개성이 없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이런 작가 면모를 종합할 때 드래곤볼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분명하게 와닿는다. 이야기의 본질을 이해하는 올바른 작가주의, 독자와 호흡하는 유연성, 작품을 떠받치는 작가로서의 근면성까지. 드래곤볼이라는 만화가 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마치 손오공의 성장기와도 닮은 측면이 있다. 천재성과 매번 이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키는 책임감이라는 점에서.
그가 만든 세계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그의 별세를 안타까워한다. 별세 소식이 알려진 뒤 프랑스 총리 가브리엘 아탈이 “용신으로도 살려낼 수 없는 곳으로 그가 갔다”는 포스팅을 올려 아쉬워했고, 아르헨티나의 한 광장에선 그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손을 들어 원기옥을 모으는 자세를 취했다. 그곳을 지나갔다면 나 역시 주저 없이 두 손을 번쩍 들었을 것이다. 성실하고 탁월한 만화가를 기리며. 그를 사랑하는 여느 지구인으로서.
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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