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의전쟁이야기] 한강의 기적을 꿈꾼 제임스 밴 플리트

2024. 3. 17.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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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말 전쟁 중인 서울에 세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밴 플리트는 서울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곳으로 보았고, 유엔군 사령관이자 전임 8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대장을 이렇게 설득했다.

그리고 밴 플리트의 지휘하에, 유엔군은 서울 북측의 창릉천에서 북한산,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촘촘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광화문 사거리 등지에 배치된 강력한 포병 화력을 바탕으로 서울로 공격하는 중공군을 격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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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말 전쟁 중인 서울에 세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무려 80만의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의 4월 공세에 38선까지 전진했던 유엔군은 서울 코앞까지 밀려 내려왔다. 이전의 위기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 남침이었고, 그다음은 1951년 1월 초 중국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38선까지 밀려났을 때이다. 이 두 번의 위기에서 서울은 함락의 운명을 맞이했으며, 시민들은 통한의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엔군의 전략은 적의 공세에 점진적으로 후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는 것이었고, 유엔군은 서울을 방어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다.
밴 플리트 중장이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밴 플리트는 서울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곳으로 보았고, 유엔군 사령관이자 전임 8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대장을 이렇게 설득했다. “맷(리지웨이의 이름), 적군은 이미 약화됐고, 어떻게 싸우는지 모른다. (적군은) 화력도 없고 공중자산도 없는데, 우리는 다 가지고 있지 않으냐. 우리 뒤로 물러나지 말고 그냥 여기서 끝내자. 이보다 이 일 마무리 짓기에 좋은 장소는 없어.” 밴 플리트의 강한 확신은 서울을 포기하는 기존의 작전 계획을 바꾸게 했다. 그리고 밴 플리트의 지휘하에, 유엔군은 서울 북측의 창릉천에서 북한산,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촘촘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광화문 사거리 등지에 배치된 강력한 포병 화력을 바탕으로 서울로 공격하는 중공군을 격멸시켰다.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유엔군의 불의 장막에 막심한 피해를 입은 채 실패로 끝났다.
육사 교정에 세워진 밴 플리트 동상
서울 사수의 결정 배경에는 밴 플리트의 과거 경험과 그로 인해 형성된 깊은 신념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 내전 당시 미국 군사고문단장으로 활약하며 이념의 대립에 의한 충돌에서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따라서 또다시 서울을 잃을 시 그것이 가져올 한국인·한국군의 상실감과 사기 저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밴 플리트는 8군 사령관 재임 기간 동안 한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며 한국군의 재건을 주도해 ‘한국군의 아버지’가 되었고, 퇴임 이후에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친한파로서 대한민국의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보고 ‘한강의 기적’을 꿈꿨고 확신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1962년 미국에서 했던 연설의 일부를 소개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산천, 아이들의 쾌활한 목소리와 웃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고향과 같은 따뜻함과 편안함이 있다. 한국은 내 고향이자 집이다. 나는 집에 곧 다시 갈 것이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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