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원주민의 투쟁, 바로사 가스전 [오동재의 파도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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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몸을 다쳐 병원을 다녀온 날, 나의 아버지가 하신 일 중 하나는 내 방 침대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티위섬 원주민들이 한국을 찾은 이유는 에스케이 이엔에스(SK E&S)가 호주·일본 에너지 기업과 함께 호주 북부에서 추진 중인 바로사 가스전 사업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사 가스전은 이후 호주에서 원주민 인권 운동의 최전선으로 급부상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원주민 지도자 중 한 명인 테레사 버크는 국회 기자회견에서 '바로사 가스전 사업은 마치 백두대간에 말뚝을 박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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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재 | 기후솔루션 연구원
어릴 적 몸을 다쳐 병원을 다녀온 날, 나의 아버지가 하신 일 중 하나는 내 방 침대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이과라 굳게 믿었던 아버지의 거침없는 ‘풍수’ 행보가 적잖이 당황스러웠어도, 자식의 건강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을 어찌할까. 할아버지가 양지 바르고 수맥이 안 흐르는 자리를 집안 어른들의 묘지로 정한 마음도 크게 다르진 않았겠다.
영화 ‘파묘’의 극중 풍수사로 등장한 김상덕(최민식)의 마음도 비슷하다. 상덕은 비과학적으로 여겨지는 ‘풍수지리’ 사상에 현대적 해석을 덧붙이는 21세기 풍수사다. 자신의 딸이 전공한 항공우주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를 계산해 인과를 예측하듯, 풍수의 음양오행은 과거부터 세대가 누적하여 맺어온 땅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인과를 예측한다. 은퇴를 앞두고 있기에 몸을 사리는 상덕이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그가 땅 속에 박힌 ‘험한 것’과 맞서게끔 만드는 것은 딸과 손자가 살아갈 땅이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얼마 전 한국을 찾았던 호주 티위섬의 원주민 지도자들도 한국의 부모 세대와 닮아 있다. 한국에 ‘풍수지리’가 있다면, 호주 원주민들에겐 바다(물), 땅과의 유대가 있다. 한국에 백두대간이 있다면, 원주민들에겐 바다와 육지의 ‘신성한 장소’가 있다. 한국에 청룡, 해치가 있듯 원주민들에겐 ‘무지개뱀’ 설화가 있다. 그리고 두 곳 모두 식민 지배의 아픈 역사가 있다. 한국은 1945년에 광복을 맞았지만, 호주 원주민들은 1967년에서야 호주 사람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획득했다.
티위섬 원주민들이 한국을 찾은 이유는 에스케이 이엔에스(SK E&S)가 호주·일본 에너지 기업과 함께 호주 북부에서 추진 중인 바로사 가스전 사업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같은 한국 공적금융기관들은 바로사 가스전 사업에 다 합쳐서 1조원 가량의 금융 제공을 약속했다.
원주민들은 사업 개발이 10년 넘게 이뤄지는 동안 알지 못했고, 2021년 사업자들의 투자가 이뤄진 후에야 사업을 알게 됐다 한다. 뒤늦게 원주민들이 한국 공적금융에 사업 지원을 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투자계약금지가처분 신청까지 한국 법원에 제출했지만 한국 공적금융의 지원을 막진 못했다.
그러나 바로사 가스전은 이후 호주에서 원주민 인권 운동의 최전선으로 급부상했다. 원주민이 제기한 소송에서 호주 연방법원이 연이어 원주민의 손을 들어줘 사업 시추 인허가가 취소되며 사업이 1년 넘게 중단됐기 때문이다. 결국 사업은 재개됐지만, 무역보험공사의 사업 금융지원 결정은 두 달 전 백지로 돌아갔다.
호주 티위섬 원주민들의 우려는 여느 한국 아버지 세대의 걱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스전 사업이 결국 선조들이 쌓아온 터전과의 유대를 끊어 계속 그 땅을 살아갈 자식 세대의 삶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원주민 지도자 중 한 명인 테레사 버크는 국회 기자회견에서 ‘바로사 가스전 사업은 마치 백두대간에 말뚝을 박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이번 방한에서 티위섬 원주민들은 한국 정부와 공적금융에 면담을 요청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 방한 1주 전, 면담 요청에 응한 일본 정부와 공적 금융의 태도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또 다른 원주민 지도자 피라웨이잉기의 말이다. “한국 사람들이 그랬듯, 우리도 우리가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유대해왔던 땅과 바다를 돌보고 보호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현 세대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갈 자식, 미래 세대를 위해서요.”
바로사 가스전에 대한 수출입은행의 금융은 5월말 연장 예정이다. 무역보험공사 또한 에스케이 이엔에스의 지원요청서 제출 시, 사업 재승인을 시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원주민들은 앞으로도 계속 싸워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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