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성수동 1위’ 섞어놨더니…“이 궁합, 난 찬성일세” [푸디人]
2000년대 초중반 대학생활의 근거지였던 신촌 인근 바에서 호기를 부리며 마셨던 술이 테킬라였다. 당시 테킬라의 맛은 참으로 쓰고 독했다. 다음날 숙취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두 번 다시 테킬라는 손대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손등 위에 설탕과 소금을 묻혀 혀로 날름 핥으며 샷잔을 마시는 퍼포먼스가 왜 멋있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 이후 테킬라를 마셔보고 싶지도 않았고 마셔본 기억도 없다. 그런데 요즘 테킬라가 뜨고 있다는 이야기에 다시 홀짝여 보기로 했다.
테킬라와의 재회는 아주 깔끔하면서도 부드럽고 녹진했다. 무식하게 입안을 타격했던 옛 기억은 거짓처럼 사라졌고 목구멍을 따라 뜨겁게 흘러가면서도 풍부한 캐러멜과 초콜릿 향, 마지막에는 여운이 남는 바닐라 향까지 마치 잘 만든 위스키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멕시코 대표 테킬라 ‘돈 훌리오(Don Julio)’는 테킬라에 대한 내 편견을 고맙게 산산조각 부숴버렸다.
서울 성수동에 있는 ‘엘 몰리노’의 오너 셰프인 진 셰프는 미국 캘리포니아 UC 버클리(UC Berkeley)에서 건축을 전공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요리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던 그가 왜 멕시칸 요리를 택했을까?
멕시칸 요리 중 특히 타코와 사랑에 빠진 이유는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진짜 멕시칸이 운영하는 타코를 처음 먹고 나서부터라고 했다.
진 셰프는 “한국에 다시 와서 부모님께 대학교 안가고 타코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한 적도 있다”고 말해 당시 그가 얼마나 타코를 간절히 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는 2017년 이역만리의 땅으로 건너가 멕시코시티의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서 멕시코 퀴진(Mexico Cuisine)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검은 머리 한국인인 그가 멕시코 현지 대회인 ‘2018 베스트 셰프 멕시코(2018 Best Chef Mexico)’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현지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덕분에 멕시코 1위이자 2023년 ‘World’s 50 베스트 레스토랑’ 13위에 선정된 레스토랑 푸욜(Pujol)에 2020년 입성해 첫 정식 아시아인 셰프로 일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 팬데믹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사했다. 팬데믹으로 2020년 멕시코에서 귀국한 그는 과카몰레(아보카도를 주로 사용한 멕시코 소스)를 와디즈 펀딩으로 판매해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고 본격적으로 멕시칸 요리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때 세운 회사 이름은 ‘몰리노 프로젝트’.
이후 2021년 11월에는 멕시칸 레스토랑인 ‘엘 몰리노’를 성수에 열어 ‘성수동 맛집’으로 거듭났다. 몰리노는 ‘갈아낸다’는 의미이며 멕시코에서 토르티야의 원물이 되는 옥수수를 가는 곳을 몰리노라고 하기도 한다.
그의 멕시칸 요리 실력은 팬데믹도 뚫고 입소문을 탔으며 2022년 9월에는 오리지널 스트리트 타코 ‘라까예 신당’을 열었다. 2023년 2월에는 클랑코 더현대서울,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국내 최초 멕시칸 파인 다이닝 에스콘디도를 선보였다.
그는 라까예에서는 2800원짜리 저렴한 타코를, 에스콘디도에서는 멕시코 정통을 계승한 음식을 선보이며 다방면으로 멕시코 요리를 알리는데 힘쓰는 중이다.
‘돈 훌리오 & 엘 몰리노’의 푸드 페어링의 첫 코스는 튜나 토스타다(Tuna Tostada)와 레포사도 마가리타(Reposado Margarita)였다.
튜나 토스타다는 튀긴 토르티야 위에 과카몰레, 치폴레마요, 마리네이트한 튜나(참치)와 살사 마차를 올려 대파로 마무리했다. 일단 상당히 매콤한 맛이 먼저 입안을 자극한다. 그리고 튜나의 살짝 기름진 부분과 튀겼음에도 담백한 토르티야가 조화를 이룬다. 맵찔이는 다소 매운 타격감에 당황할 수 있는데 마가리타를 곁들이면 자연스럽게 중화된다.
테킬라 베이스인 마가리타는 인지도로 따지면 클래식 칵테일 중 최고 수준으로 꼽힐 것이다. 테킬라, 트리플 섹(달콤한 리큐르), 오렌지 맛 리큐어, 라임 혹은 레몬 즙을 가지고 만드는데, 글라스 주위에 소금을 두르는 것이 특징이다. 보통 실버(silver) 테킬라 혹은 블랑코(blanco) 테킬라를 써서 만드는데, 이번에는 돈 훌리오 레포사도로 만들어 부드러운 레몬 시트러스 향과 달콤한 맛이 더 물씬 풍겼다.
한 번 삶은 문어를 멕시코 칠리허브오일에 야채와 함께 볶아 과카몰레와 함께 올렸다. 문어의 식감이 살아있고 소스와 기분 좋은 앙상블을 이뤄냈다.
돈훌리오 아녜호와 베르무스를 사용한 아녜호 맨하튼은 달콤한 캐러멜과 꿀의 향이 풍부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바바코아 플라우타스는 멕시코 건고추들과 향신료와 함께 오랜 시간 브레이징(한국 요리 중 찜과 비슷한데 물이 증발하면서 발생하는 증기로 익히는 것)한 폴드(저온 훈연) 비프를 토르티야에 감싸 튀긴 것이다. 어느 정도 타코를 먹어보니 그제야 토르티야의 매력이 드러났다. 거칠고 투박한 듯한 식감이 토르티야 안의 소스와 재료들과 좋은 궁합을 보였다.
돈 훌리오 1942는 창업주 돈 훌리오 곤잘레스가 테킬라 제조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2년 세상에 선보인 럭셔리 테킬라이다. 그가 처음 테킬라의 여정을 시작한 해인 1942년에서 착안해 이름이 붙여졌다. 한 병이 생산되기까지 최소 8년이 소요되며, 미국산 오크통에서 최소 2년 이상 숙성한 100% 블루 아가베가 사용된다.
테킬라 같지 않은 풍부한 캐러멜과 헤이즐넛, 아몬드, 커피 그리고 바닐라와 초콜릿이 어우러진 향에 놀라고 바닐라의 맛과 은은하면서 부드러운 목넘김에 두 번 놀란다. 키 작은 뭉툭한 형태의 돈 훌리오 제품과 달리 병이 곧게 길게 뻗은 것도 특징이다. 병 디자인은 길게 뻗은 아가베 잎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설탕을 충분히 뿌린 츄러스와 돈훌리오 블랑코를 홍차와 초콜렛과 함께 인퓨징(술에 재료의 맛을 우려내는 것)해 만든 칵테일은 이 곳의 시그니쳐 메뉴이다. 특히 몰레 블랑코는 극강의 달콤함과 기분좋은 끈적함을 보여줬다. 몰레는 각종 양념을 배합해 만든 소스를 의미하는데 멕시코의 요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돈 훌리오는 훌리오 곤잘레스(Julio Gonzalez)에 의해 시작된 테킬라 브랜드이다. 1925년생인 훌리오 곤잘레스는 멕시코의 할리스코(Jalisco) 주 아토토닐코 엘 알토(Atotonilco el Alto) 출신으로, 테킬라를 만드는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린 나이부터 말을 타고 테킬라를 유통하고 수익을 내 가족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아토토닐코 땅이 특별하다는 것을 느꼈고, 지역의 부유한 상인을 설득해 1942년 돈 훌리오 테킬라를 출시했다.
제품 포트폴리오를 보면, 세계 최초의 럭셔리 테킬라인 돈 훌리오 리저브, 돈 훌리오 블랑코, 아녜호, 레알 그리고 돈 훌리오 1942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훌리오 곤잘레스는 ‘돈 훌리오’로 다시금 명명됐고, 멕시코 테킬라의 얼굴이자 아이콘이 됐다.
멕시코에서 약 1만년 전부터 자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아가베는 200종 이상이 있지만, 테킬라는 오직 블루 웨버 아가베로만 만들 수 있다. 블루 웨버는 다른 아가베 종들보다 독특하고 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장성한 블루 웨버 아가베는 약 2미터가 넘고, 녹색-청색으로 구분되는 뾰족한 다육질 잎을 가진 큰 다육식물로 자라난다.
그 가운데 멕시코 할리스코 지역에서 생산되는 블루 아가베를 최상급으로 쳐준다. 돈 훌리오의 모든 원액은 할리스코의 하일랜드에서 생산되며 따뜻한 낮과 시원한 밤, 높은 고도와 미네랄이 풍부한 황토는 블루 아가베 식물이 번성할 수 있게 만든다. 돈 훌리오는 5년에서 6년 정도 자란 아가베를 사용한다.
테킬라를 만드는 과정은, 먼저 아가베의 수액을 발효시키면 하얗고 걸쭉한 멕시코산 토속주 풀케가 된다. 이 풀케를 증류한 술이 테킬라다. 테킬라는 아가베 당분의 함량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51%의 당분을 블루 아가베로 만든 믹스토 테킬라는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며, 블랜디드 위스키와 비슷한 맛이다. 이에 반해 100% 블루 아가베 당분인 아가베 테킬라는 강한 맛이 싱글몰트 위스키와 유사하다.
테킬라는 숙성 정도에 따라 4단계로 구분해 출시된다. 숙성되지 않거나 2개월 미만으로 숙성한 블랑코와 실버, 1년 미만의 숙성을 거친 레포사도, 1년 이상 숙성한 아네호 등급이 있으며 3년 이상 숙성을 거친 엑스트라 아네호는 최상급으로 불린다.
위스키는 보통 숙성하는 과정에서 풍미가 깊어지지만 아가베를 원료로 하는 메스칼이나 테킬라는 오히려 그 반대다. 아가베는 꽃이 피고 수확하는 데만 십수 년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토양과 기후의 개성이 고스란히 축적되고, 자연스러운 스모키 향이 뿜어 나온다.
아가베 관리자인 히마도(Jimador)는 가장 좋은 아가베 수확 시기를 알기 위해 몇 세대에 걸쳐 지식을 전수한다고 한다. 최적의 수확 시기는 아가베 중 가장 필수적인 부분인 하트에 있는 전분과 당분의 농도에 따라 결정된다. 아가베 하단의 붉은 반점과 잎 들이 숙성된 바나나처럼 갈색으로 변하면 수확할 시기가 된 것이다. 1리터의 아가베 테킬라 한 병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블루 아가베 약 7kg(14파운드)이 필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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