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대 증원 갈등에 가려진 필수의료 개혁 논의
전공의 집단 사직 한달째 의료공백 지속
'빅5' 상급병원 중심 문제점 속속 드러나
비대면진료·간호사·공공병원이 구원투수
건보개혁 맞물려야 진정한 의료개혁 가능
지난달 19일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시작된 서울 ‘빅5’ 등 상급병원들의 의료 공백 사태가 한 달째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의정(醫政) 갈등은 강대강 대치 속에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장기화되는 모습이다. 우려했던 의료대란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의료 선진국이라는 한국 의료 시스템의 민낯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번 사태가 정부와 의료계에 던진 과제도 만만치 않다. 상급병원 쏠림 현상을 어떻게 해소하고 지역·필수의료를 현장에 안착시킬 것인지, 지속 가능한 의료 시스템 구축을 위한 건강보험 개혁에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지 등이 핵심 과제다.
가장 먼저 드러난 문제는 상급병원의 기형적인 운영 시스템이다. 전공의 비중이 높은 빅5 병원의 전공의 비중은 평균 39%에 달한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 90%를 넘어서면서 이들 병원의 입원·수술은 평소의 30~50% 수준까지 떨어지고 하루 수십억 원씩 적자를 보고 있다. 불과 한 달여 의료 공백으로 상당수 병원이 비상경영을 선언하고 서울대 등 일부 병원은 수백억 원짜리 마이너스통장을 만들 정도로 위기다.
그동안 상급병원 쏠림 현상은 여러 차례 지적돼왔다. 빅5 병원에서 진료받은 지방 환자는 2013년 50만 245명에서 2022년 71만 3284명으로 10년 동안 42.5% 늘었다. 같은 기간 지방환자들이 쓴 진료비는 140% 급증했다. 최상의 의대 교수진과 전문의, 시설이 갖춰진 상급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고속철도까지 타고 몰려든 결과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의료 시스템 등 의료 격차도 이를 부추겼다.
정부의 의료 공백 대응 과정에서 그동안 제한적으로만 허용됐던 비대면 진료, 간호사 업무 범위 확대와 함께 전체 의료기관의 5%(병상 수는 10%)에 불과한 공공병원의 역할이 부각됐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비대면 진료는 2배 이상 많아졌고 간호사들은 응급환자를 대상으로 심폐소생술을 하고 응급 약물을 투여할 수 있게 됐다. 비대면 진료, 간호사, 공공병원은 의료 공백을 막는 훌륭한 구원투수가 되고 있다는 평가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왜곡된 건강보험 수가 개편이다. 필수의료에 대한 낮은 건보 수가는 돈이 안 되는데 업무 강도는 세고 의료 소송 위험까지 높은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에 의사가 없어 진료 차질을 빚는 상황을 낳았다. 반면 수입이 많고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도 있는 ‘피안성정(피부과·안과·성형외과·정형외과)’에 의사들이 몰리게 했다. 실손보험이 피안성정 관련 과에 비급여 의료비를 보장하면서 이 같은 현상을 더욱 촉발했다.
정부가 앞으로 5년간 유지될 ‘제2차 건강보험종합계획’을 발표한 것은 의대 정원 확대 발표 직전인 지난달 초다. 의료비 증가의 주범인 비급여·혼합 진료 항목에 메스를 대 건보 재정을 효율화하는 한편 건보 수입을 늘리기 위해 현재 8%인 건보료율 법정 상한선을 높이는 사회적 합의를 시작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필수의료 수가 인상을 위해 앞으로 5년간 10조 원을 투입한다는 내용도 반영됐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전문의 중심 병원 구조 개편,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등 필수의료 4대 과제도 발표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 시스템 개혁은 의대 정원 확대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의대 증원과 함께 지역·필수의료 확대, 이를 위한 건보 개혁까지 삼박자가 맞물려야 가능하다. 하지만 의료 공백이 한 달째 이어지면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한 게 현실이다. 건보 개혁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65세 이상 고령인구 증가에 따른 의료비 폭증, 저출생으로 인한 건보 수입 감소로 지속 가능한 재정 운용이 어렵기 때문이다. 필수의료 수가 인상을 위해서는 건보 재정의 안정이 필수다. 정부가 건보 재정 효율화를 위해 피부양자 제도 개선 등과 함께 건보료율 법정 상한선 인상이라는 카드까지 꺼낸 배경이다. 무엇보다 건보료 인상을 반기지 않는 국민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기까지 진통이 불가피하다. 필수의료 개혁의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는 더 늦기 전에 얼굴을 맞대고 필수의료 개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김정곤 기자 mckids@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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