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갈등 한달에 환자들 불안 가중..."사회적 합의로 파국 막아야"
복지부, "환자 생명 심각한 위협"
종합병원 잇단 병동 폐쇄·축소에 의료 공백 확산
국민 49% "정부 의료 공백 대응 잘못해" 여론속
"정부·의료계 한 발짝씩 양보해야" 목소리 높아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추진으로 촉발된 정부와 의사들 간 갈등이 한달째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사직 의사를 표명하고 병원에 나오지 않는 전공의들에 대한 행정처분을 진행중인 가운데 전임의와 의대 교수들의 사직도 전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대한소아심장학회 등 의학 학회들의 정부 비판 성명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요 병원들의 병동 폐쇄·축소 잇따르고 있으며 서울대 등 대형 병원들은 내원 환자가 급감, 하루 적자가 수십억원에 달하면서 자칫 존립 위기에까지 몰릴 형편이다. 정부는 연일 의료 개혁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있지만, 의사들은 현실성이 부족하고 독소 조항이 숨어 있다는 입장이어서 좀체 타협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갈등이 좀 더 지속될 경우 자칫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붕괴될수도 있다며, 정부와 의사 가 한발씩 양보해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 49% "정부, 의료 공백 대응 '잘못하고 있다'…의대 교수들도 집단 사직 결의
의정 간 갈등이 계속되면서 일방적으로 의료계를 비판하던 여론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한국갤럽이 지난 15일 공개한 결과(자체조사, 조사기간 12~14일, 전화조사원 인터뷰 방식,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에 따르면, 의료계의 반발에 따른 정부의 대응 방식에 대해 '잘하고 있다'가 38%, '잘못하고 있다'가 49%로 나타났다. 정부가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3000명에서 5000명으로 확대하기로 한 방침을 두고 '찬성한다'는 응답이 47%인 반면, 규모와 시기를 두고 중재안을 마련해야 한다(41%), 정원을 확대하지 말아야 한다(6%)는 응답도 47%로 집계됐다.
'아플 때 진료를 못받을 까 걱정된다'고 답변한 응답자는 69%(매우 걱정 43%, 어느 정도 걱정 26%)에 달했다. 반면 '걱정되지 않는다'는 응답자는 28%(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20%,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8%)였다. 의견을 유보한 응답자는 3%에 그쳤다. 의대 정원 증원에 반대하는 응답자와 모름·응답 거절은 각각 6%였다.
전공의 이탈이 장기화하는 와중에 병원을 지탱해온 의대 교수들도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하자 환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전국 16개 의과대학 교수들이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에 대한 사법적 조치가 시작되거나 의대생들이 유급 위기에 처할 경우 오는 25일부터 사직서를 내기로 했다. 다만 사직서를 제출해도 환자 진료엔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서울대, 가톨릭대, 울산대 등 세 곳의 의대 교수협의회는 집단 사직서 제출을 결의했다. 이들 모두 '빅5(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 병원을 수련병원으로 두고 있다. 나머지 '빅5' 병원인 세브란스병원과 삼성서울병원을 각각 수련병원으로 둔 연세대와 성균관대 의대 교수들도 집단행동을 논의 중이다. 연세의대 교수 비대위는 오는 18일 회의를 열어 대응 방안을 결정하고, 성균관의대 교수협은 이번 주 내 비대위를 출범해 다른 대학과 협력하기로 했다.
이들과는 별개인 전국의대교수협의회도 대학별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대한수련병원협의회는 지난 13일 이사회를 열어 전공의들이 수련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정부는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의료계는 실효성 있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나눴다.
병원을 떠난 1만2000명에 가까운 전공의들은 정부의 촉구에도 불구, 여전히 대부분 미복귀한 상태로 정부의 공중보건의의 투입에도 병원의 진료 차질은 빚어지고 있다.
◇"2000명 증원 변경 없다" vs "과학적 근거 없고 교육법에도 저촉"
이번 의정 갈등의 출발은 지난달 6일 보건복지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라는 발표였다. 현재 3058명인 전국 40개 의대의 정원을 단번에 5048명으로 65%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이렇게 의사를 대폭 확충하면 이른 바 '낙수 효과'로 인해 지역·필수 의료 의사 부족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의사들은 △정년 이후에도 일하는 의사들이 늘고 인구는 정체되면서 우리나라 의사 증가율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을 훨씬 넘어서며 △지역·필수 의료 문제는 의사 수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라 지역·필수 의료에 의사들이 지원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 시스템을 마련하고, 의료분쟁의 위험을 해결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2000명 증원시 의학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며 반대했다. 위험하고 힘든 필수의료 영역의 진료에 대한 보상과 의료행위에 대한 민형사상 신분보장이 안 된다면 의사를 100만명 뽑아도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의대 정원 증원이 바람직한지, 증원을 하면 몇 명이 좋은지는 의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지만 교육 여건 등을 감안할때 대체로 현 정원의 10~15%선인 300~400명 정도가 적당하다는 의견이 많다. 의대 학장들이 설립한 단체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는 350명 증원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힌 상태다. 서울대병원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12일 의대증원 관련 대화 협의체 구성에 국민단체를 포함하고, 의대 증원 규모는 외부기관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논의하자고 정부 측에 제안했다. 2000명을 당장 증원할 것이 아니라 공신력 있는 기관에 연구를 의뢰하고 1년 후 증원 규모를 정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의사들의 의견을 거부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2일 "의료개혁을 원칙대로 신속하게 추진하라"고 지시했으며, 한덕수 국무총리는 13일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대해 "정부의 결정 근거는 명확하다. 2035년에 의사 1만명이 부족하다는 여러 전문가의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연구결과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의사들은 보건복지부가 2000명 증원의 근거로 제시한 KDI와 보건사회연구원, 서울대 의대 홍윤철 교수 연구 등 세 논문의 저자들도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제시하지 않았으며 정부가 인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며, 정부의 의대 정원 대폭 확충 계획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또 전국 33개 의과대학 교수협의회 대표는 지난 5일 서울행정법원에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2025학년도 의대 2000명 증원 처분과 그 후속 처분에 대한 취소소송을 제기하고,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서도 제출했다. 교수협의회는 "고등교육법상 대학 학과 증원 결정은 입시의 공정성 등을 위해 해당 학년도의 1년 10개월 전에 공표돼야 하는데 올 입시가 8개월여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건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의정 갈등의 핵심인 '20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해선 정부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며 완강한 태도다. KAMC가 350명을 제시한 점으로 볼때 현 정원의 10% 안팎에서 정원을 늘리는 건 의사들이나 전공의들에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카드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가 워낙 강경, 협상의 문은 닫혀있는 상태다. 안팎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여러번 2000명을 언급한 까닭에 2000명이라는 숫자는 바꿀 수 없는 '성역'이 됐다는 소리가 나온다.
한 대형병원의 의사는 "응급실, 소아과, 산부인과 및 필수의료과들은 시스템 개선을 통해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전문의들이 이미 많이 있다"며 "현재 다른 직종에서 일하고 있지만, 의료계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개선하면 당장 1년 안에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는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낙수 효과' 있을 것" vs "의사와 변호사 시장 차이도 모르는 소리"
정부는 의대 정원을 늘리면 의사들이 늘어 어쩔 수 없이 지역·필수의료 의사가 늘어날 것이라는 이른 바 '낙수 효과'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면서 변호사 시장을 그 예로 꼽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도입 등으로 지난 10년간 변호사 숫자가 2배 가량 증가하면서 지방 변호사도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지방서도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받게 됐다는 것이다. 한덕수 총리는 이를 근거로 의대 증원 근거는 명확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의료 현장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는 게 의사들의 지적이다. 첫째, 의사들이 지방에서 일하려면 자신의 돈을 들여 건물과 의료장비를 구하고, 간호사 등 보조인력도 채용해야 한다. 작은 사무실만 필요한 변호사들의 개업과는 비용을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개업을 하더라도 저출산과 인구 정체로 환자 수가 줄어들고, 대부분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도시의 대형 병원으로 환자들이 가 도저히 병원을 운영할 수 없게 된다. 둘째, 변호사들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계약에 따라 자유롭게 서비스 보수를 받을 수 있지만 의사들은 정부의 엄격한 수가 규제로 마음대로 서비스 제공 댓가 또한 받을 수 없다. 이러니 어느 의사가 지역에서 일하려 할 것이냐는 얘기다.
◇"필수의료 지원 패키지로 의사 돕겠다" vs "의사 수익 기반 빼앗고 개원의 통제 발상"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필수의료 지원 패키지에도 독소 조항이 숨어 있다는 게 의사들의 주장이다. 먼저 급여진료와 비급여진료를 동시에 하는 '혼합진료'를 금지한다는 조항이다. 예를 들어 환자가 근육통이나 관절통으로 치료를 받을 때 급여항목인 물리치료를 받게 되면, 추가적으로 받게 되는 도수치료 등 비급여 항목 치료를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더 나은 치료를 위해 환자가 개인적으로 진료비를 부담하거나, 또는 추가적인 보험료를 내고 실손보험을 통해 보장받고자 하는 비급여 진료 부분을 제한하겠다는 것은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의사의 진료권을 훼손한다는 게 의사들의 입장이다. 이런 혼합진료 금지로 인해 이익을 보는 곳은 환자가 아니라 실손보험회사뿐이라는 것이다.
또 일정 기간 임상 수련을 마친 의사에게만 진료 권한을 부여하는 '개원 면허제'를 도입하려는 것도 의사의 개원을 통제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우리나라 의료는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의료기관이 국민들에게 건강보험 급여를 제공해야하는 의무를 가진 당연지정제로 운영되고 있다. 2002년 헌법재판소는 '비급여 진료비를 통해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당연지정제를 통한 수가의 통제가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수가를 통해 의사들이 제공하는 의사 서비스 가격을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정제 때문이라는 판결이다. 그런데 당연지정제 이후 합법적으로 진행돼왔던 비급여 진료를 '혼합진료'라는 용어로 제한하면 수가를 통한 서비스가격 통제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한정된 건강보험기금을 바탕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의료수가를 결정하고, 의료기관을 실사한 후 의료비용을 지불하는 구조다. 수가가 원가보다 낮은 까닭에 의료기관들은 만성적인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비급여 진료를 통해 적자를 메꾸고 있다.
◇복지부 무능에 흔들리는 대한민국 의료시스템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서 물러설 뜻이 없고, 의사들을 압박만 하지 협상 문은 아예 닫은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고 의대생 대부분은 휴학하며,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들도 학교를 떠나면 대한민국 의료체계의 붕괴는 불을 보듯 뻔하다. 정부가 압박만 한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의대 증원, 전공의 자격 박탈 등을 둘러싼 무수한 법적 공방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은 지난 1일부터 의대생과 인턴 173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의료대란과 총선, 젊은 의사 설문조사' 결과, 필수의료를 전공과목으로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답한 의대생과 인턴은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발표 전후 1357명에서 49명으로 76% 감소했다고 밝혔다. 의대 정원 확대 발표 이후 지역의료 기피 현상도 악화됐다. 지역의료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자는 정부의 정책 발표 전후 1241명에서 141명으로 64% 줄었다. 더욱이 예비 의사들의 상당수는 해외에서 활동하겠다고 응답했다. 의대 정원 확대 정책 발표 이후 의업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힌 응답자는 1686명에서 400명으로 74% 감소했고, 해외에서 활동하겠다는 응답자는 16명에서 967명으로 55% 증가했다.
필수의료 지원 패키지를 정교하게 설계한 후 의료계와 협의를 거쳐 의료시스템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단계적으로 실시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적지 않았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를 먼저 던지고 전공의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필수의료 지원 패키지를 내놓은 모양새가 된 보건복지부의 무능한 정책 추진에 국민들만 골병이 들게 됐다.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고 수준높은 의료서비스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은 하루 아침에 환자들이 치료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또 의협의 고압적인 듯한 태도와 함께 보건복지부 장차관이 의사들을 공식 브리핑에서 '의새'라고 멸시 발언을 하는 등 강압적인 자세를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양측의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이번주가 지나면 '루비콘 강'을 건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의대 교육은 1년간 휴무 상태로 들어가고, 전공의들이 없어 대형 병원들은 운영이 어려워진다. 필수의료 과에 지원하려는 전공의들은 사실상 전무하게 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빅5 병원들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중형 병원을 키운다고 해서 그동안 대형 병원들이 담당해왔던 기능과 역할을 다할 순 없다.
정진행 서울대 의대 교수(병리과)는 "이대로 가면 세계 최고의 의료시스템이 무너진다"며 "정부가 이번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미래 의료를 책임지는 전공의들과 직접적인 대화와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강현철기자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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