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내선번호 드러나자 이종섭 도피시켰나 [아침햇발]
손원제 | 논설위원
미스터리가 풀리고 있다.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갑작스러운 오스트레일리아(호주)행은 많은 의혹과 의문점을 품고 있다. 그중 가장 사람들을 의아하게 한 건 왜 하필 총선을 앞둔 지금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이다.
아마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수도권 출마자들이 가장 곱씹고 있을 질문일 것이다. 조금만 더 있다가 총선 끝나고 내보내든지 하지, 왜 지금 이 사달을 만든단 말인가. 가뜩이나 도움 안 되는 용산의 무신경에 열이 뻗친 이들도 적지 않으리라.
더불어민주당 공천 논란이 가열되며 국민의힘에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는데, ‘런종섭’ 논란은 여기에 찬물 한 바가지 쏟아부은 꼴이 됐다. 중대 의혹을 환기시키며 정권 심판론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왜 이런 자충수를 둔 걸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였기에, 각종 정치적 분석이 제기됐다. 호전된 선거 분위기에 다시 오만해졌다부터 지금 아니면 내보내기가 더욱 어려워질 걸로 봤을 것이다까지.
그러던 중 지난 7일 문화방송(MBC) 단독 보도가 나왔다. 당일에는 못 보고, 나중에 다른 매체에 인용된 내용을 접했다. 순간 무릎을 탁 쳤다. 아직 못 본 분들을 위해 제목을 그대로 옮긴다. ‘[단독] “수사결과 발표 중단” 변심 직전…‘대통령실’ 일반전화 받았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 전 장관은 지난해 7월30일 해병대 수사단의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결과를 결재한 뒤 불과 하루 만인 31일 돌연 마음을 바꿔 결과 발표를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 지시를 내리기 바로 직전인 오전 11시45분에서 50분 사이에 한 통의 전화가 이 전 장관 휴대전화에 걸려왔다. 이 통화가 이뤄지고 7분 뒤 이 전 장관은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수사 결과 발표 취소를 지시했다. 또 참모진 긴급회의를 열고, 해병대 부사령관을 불러 ‘수사 결과에 누구누구를 구체적으로 적지 말라’는 등 지침을 전달했다. 전날 ‘수사가 잘됐다’며 흔쾌히 결재 사인을 했던 그가 이 전화 한 통을 기점으로 갑자기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도, 경찰에 이첩하지도 말라는 지시를 잇따라 내리게 됐다는 것이다.
이제 하이라이트다. 그렇다면 그 전화는 어디에서 걸려온 것인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이 전 장관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확보해 분석했더니, 발신지는 ‘이태원로’, 가입자명은 ‘대통령실’이었다. 두둥.
그간 대통령실과 국방부는 ‘사단장 혐의를 적시한 해병대 수사 결과에 격노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 전 장관을 연결하라고 한 뒤 질책했다’는 의혹 자체를 부인해왔다.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해병대 수사가 거론된 사실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 회의 앞뒤로 국방비서관과 해병대사령관 사이 통화도 이뤄진 적이 없다고 거듭 부인했다.
하나하나 거짓말로 드러나고 있다. 국방비서관은 이날 해병대사령관과 두번이나 통화했다는 사실이 군검찰 자료로 밝혀졌다. 여기에 드디어 대통령실 내선 번호가 이 전 장관 휴대폰에 찍혔다는 사실까지 파악됐다. 이제 이 전 장관이 과연 대통령실 누구와 통화했는지를 답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이 닥쳐오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 시점에 윤 대통령은 이 전 장관을 급에 안 맞는 호주 대사로 전격 임명했다. 출국금지를 풀어주고 신임장 수여식도 생략한 채 사본을 들려 비행기에 태웠다. 보스의 비밀을 쥔 부하의 증언을 막으려고 국외로 도피시키는 범죄 누아르 영화의 플롯을 누구나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런 의혹을 감수하고라도 내보내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 아닐까. 수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특히 대통령실 내선번호가 드러난 상황의 의미를 직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식을 벗어난 자해성 도피극의 경위는 윤 대통령이 용산 최고의 수사 전문가라는 사실에 비춰볼 때 비로소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다.
미국은 대통령이 자신이 관련된 사건 수사에 개입하는 행위를 ‘사법방해죄’로 단죄한다. 리처드 닉슨은 연방수사국(FBI)과 특별검사의 워터게이트 수사·기소를 방해하도록 중앙정보국(CIA)에 지시했다가 탄핵 직전 하야했다. 이때 시도됐던 게 증인 매수였다. 도널드 트럼프와 빌 클린턴도 사법방해 혐의로 탄핵 위기에 몰린 바 있다. 우리는 포괄적인 사법방해죄 대신 범인도피죄 등 구체적 혐의를 적용하게 돼 있다.
‘수사 외압’ 직권남용으로 출발한 윤 대통령의 범죄 의혹은 여러 부처가 개입된 도피극을 거치며 정권 차원의 의혹으로 번져가고 있다. 윤 대통령 또한 조만간 ‘진실의 순간’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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