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한국인 간첩죄 체포 왜?…“한국, 용인 못 할 급소 건드려”
백씨 사건은 우크라전쟁 발발 이후 양국 갈등 연장선
역설적으로 외교 모멘텀 제공 관계 추락 방지 역할도
한·러 지정학적 불가분 운명…‘기회의 창’ 될 수 있어
이념보단 국익 택한 노태우·박근혜정부 지혜 배워야
한국 외교, 스스로 자율성 키우는 내적 균형 강화를
러시아 및 한·러 관계 전문가인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17일 러시아 당국이 한국인 선교사 백모씨를 간첩혐의로 체포한 사건과 관련해 한·러가 서로의 취약점을 건들며 갈등하고 있는 양측 긴장 관계의 연장선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이 사건이 외교 교섭의 모멘텀을 제공함으로써 벼랑 끝에서 충돌하고 있는 양국 관계가 낭떠러지로 충돌하는 것을 막는 가드레일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향후 한·러 관계와 관련해 “한·일 관계에서도 보듯이 국제정치에서 감정이 이성을 압도할 때 국익이 손상되고 외교적 입지가 축소된다”며 “좌고우면의 외교적 지혜로 한·러 관계의 틈이 더는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15∼17일 러시아 대선 5선이 확실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재선 가능성이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브로맨스(남성 사이의 애정에 가까운 우정)를 거론하면서 “거의 확실시되는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럭비공처럼 예측불허로 요동칠 국제 질서의 ‘판’이 벌써 눈 앞에 펼쳐진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당국의 백씨 체포를 어떻게 보나.
“현재 한·러 관계에 시베리아 동장군이 찾아왔다. 균열의 시작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이 서구와 단일대오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이와 대칭적으로 북한이 러시아에 포탄과 무기를 제공하면서 한·러 간 외교적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후 양국관계는 악화 일로를 거듭하다 근자에는 날카로운 외교적 파열음을 내며 파국 일보 직전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지난 1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극동지역에서 북한이탈주민 구출 활동을 해오던 한국인 선교사 백 모씨를 간첩 혐의로 체포·구금했다. 이 사건은 발생 2개월이 지나 3월 11일자 타스통신 보도를 통해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2월 초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비판한 북한의 ‘핵 선제 사용 법제화’를 놓고 양국 고위 외교 당국자 간 거친 말 폭탄이 오고갔다. 악재는 또 있다. 다음 달 17일과 19∼21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예정된 러시아의 스타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내한 공연도 ‘친(親)푸틴 발레리나’라는 논란 끝에 취소되었다. 한·러 관계가 냉각을 넘어 갈등의 본격적인 진입을 예고하는 적색 경고등과도 같은 장면들이다.”
-나름 관리되던 한·러 관계가 악화하는 배경은.
“1990년 수교 이후 나름 안정적인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던 서울과 모스크바 사이에 왜 이런 불협화음이 생긴 걸까? 여러 사유가 있겠지만 핵심 이유는 상호 용인할 수 없는 민감한 급소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러 양국의 정면충돌에서 미·러 대리전 성격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부지불식간에 남북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이되어 가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서로 용인 못할 급소란 무슨 말인가.
“러시아는 자국이 제공한 첨단 방산기술을 습득해 세계 무기 시장 메이저 리그에 진입한 한국이 적성국 폴란드에 이어 교전국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 공급 가능성을 시사한 것에 대해 큰 배신감과 함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서구가 가한 지옥의 제재에 우호국 한국이 예전과 다르게 적극 참여한 것도 크렘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듯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포탄 간접 지원과 지난해 7월 윤석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방문은 마침내 러시아의 반작용을 초래했다. 크렘린은 한국에 대한 실망감을 대북 전략적 연대 강화로 표출했다. 한국을 길들이는 맞대응 차원에서 북한 카드를 꺼낸 것이다. 지난해 9월 극동의 우주기지 보스토치니에서 전격 연출된 푸틴·김정은 정상회담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레드라인을 넘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성 신호로 읽힌다.”
-한국의 외교안보적 고민도 있을 것이다.
“서구 세계의 중요한 일원인 한국은 무고한 인명 살상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영토주권을 유린한 러시아의 국제법 위반을 묵과할 수 없다. 글로벌 중추 국가 구현을 목표로 가치 외교를 선명하게 내세운 윤석열 정부로서는 읍참마속(泣斬馬謖: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엄정히 법을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의 비유)의 심정으로 국제사회의 대러 제재에 강한 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동안 유엔의 대북 제재에 구멍을 내주고 다양한 수준에서 평양을 보듬고 후견한 모스크바의 행태도 못마땅하다. 러시아가 일종의 보복 조치로 취한 대북 군사협력과 전략적 밀착은 서울의 안보적 신경 줄을 거슬리게 한다. 대북 무기체계 고도화 지원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무력 충돌의 우발성과 휘발성을 높인다. 특히 군사 정찰위성 기술 제공은 미군 및 한국군에 대한 군사 표적화를 개선해 한국의 안보에 칼날이 된다. 첨단 위성 카메라가 장착된 북한 미사일 기술의 진화는 대북 억지력의 핵심인 한국형 3축 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3축 체계란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움직임에 선제적으로 타격하는 킬체인(Kill Chain), 북한 미사일을 공중에서 탐지·요격하는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북한 핵·미사일 공격 시 보복하는 대량응징보복(KMPR)을 가리킨다)
-한·러 관계의 파국을 막으려는 외교적 노력은 없나.
“현재 한·러는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형세다. 각기 북한과 우크라이나라는 사활적 이익에 갇혀 있어 의견 차이를 좁힐 여지가 적어 보인다. 다행히도 양측은 아직 레드라인을 넘지 않은 듯하다. 물밑에서는 고위급 소통을 통해 어떻게든 파국을 막으려는 외교적 노력이 관찰된다. 지난 2월 2일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부 차관이 방한하여 3일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을 비공식 면담한 것이 그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충격 방지용 가드레일 설치를 위한 지속적인 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가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역설적이게도 러시아 보안 당국의 한국인 선교사 체포 사건은 양국관계의 벼랑 끝 추락을 막는 완충재가 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 노동자와 탈북민을 돕던 백씨를 간첩혐의로 체포한 사건은 어찌보면 북한에게는 ‘보은’, 한국에게는 ‘뒤끝작열’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언론에 터트린 시점과 보도 방식을 보면 해석은 달라진다. 러시아는 백씨가 체포되고 두 달이 지난 뒤에야 관영 매체 타스통신을 통해 보도했다. 말하자면 백씨를 인질로 잡으면서 외교적으로 공론화한 것인데, 이는 러시아가 백씨 사건을 외교협상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국이 백씨의 신변 안전 및 권익보장과 석방을 위한 교섭을 요구해 올 것이기 때문에 이 모멘텀을 통해 한·러 간 긴장의 증폭을 막는 가운데 이해충돌의 주요 현안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최근 한·러 갈등 관계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주지하듯 현재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를 직접 지원하라는 서구 세계의 강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러시아 역시 한국의 행보를 예의주시하며 대북 군사적 밀착의 수준과 강도를 조절하고 있다. 만약의 현재화, 즉 금지선의 월선(越線)은 서울과 모스크바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온다. 북한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한·러 간 직·간접적인 군사적 대립 구도 형성은 상호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비용 지출을 요구할 것이다. 양국의 협력이 제공해 주는 미래의 기대이익에도 지대한 손실을 초래할 것이 자명하다. 유라시아 전문가 대다수가 지적하듯, 한·러 간에는 지정학적·지경학적 측면에서 상호 보완적이고 호혜적인 공유 이익이 많아 우호 관계 유지가 양국 모두의 국익에 부합한다. 한·러 관계의 경색이 과연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지 곰곰이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국익에 부합하는 외교’란 무엇인가.
“외교에서 ‘가치’는 국익 실현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가치와 실리는 상호 보완재일 뿐 대체재가 아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통찰처럼 ‘가치로 엮어진 거미줄은 국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배후로 빈살만 왕세자를 지목하며 사우디를 ‘국제적 왕따’로 만들겠다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이러니하게도 중·러 견제를 위해 빈살만을 직접 찾아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공산 베트남이 불구대천(不俱戴天: 이 세상에서 같이 살 수 없을만큼의 큰 원한의 비유)의 원수 미국과 수교하고 전략적 동반자 관계까지 맺었다. 미국의 핵심 동맹 일본이 반러의 선봉장처럼 행동하지만, 자국이 투자한 사할린 가스전(사할린-2 프로젝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회고컨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익 앞에는 장사(壯士)가 없었다.”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국익 외교란.
“국익 수호와 확대가 핵심 목표인 외교는 결국 인내와 이성의 게임이다. 한·일 관계에서 보듯, 국제정치에서 감성이 이성을 압도할 때 국익은 손상되고 외교적 입지는 축소된다. 상대가 세계적 권력 보유자이자 거대한 자원 부국이며 과학·기술 강국 러시아라면 더더욱 그렇다. 윤석열정부가 대러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이유는 다양한 수준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한·러 관계는 왜 중요한가.
“우선 한·러 관계의 지정학(地政學)적 숙명성을 지적할 수 있다. 코드와 가치가 안 맞는다고 이사 갈 수 없는 지리적 이웃이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적 관계인 것이다. 러시아는 두만강 상의 끝자락을 경계로 19㎞의 국경선을 마주한 인접국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러시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세력 구도에서 항상 ‘갑(甲)’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항상 자국의 중요한 국가적 이해관계 영역 속에 포함하면서 한국의 운명을 좌우해 왔다. 1896년 아관파천, 1905년 노일전쟁, 1945년 북한의 점령과 남북 분단, 1950년 한국전쟁 등이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러시아를 어떻게 봐야 하나.
“소련의 해체와는 무관하게 러시아는 여전히 국제적 세력 게임의 핵심 참가자이자 한반도에 깊은 이해관계를 투영하는 유라시아 강대국이다. 지정학적 현실주의 측면에서 한국의 대외적 핵심 과제인 한반도 평화 구도 정착과 통일은 사실 러시아와 분리해서 설명하기 힘들다. 러시아는 남북 분단의 원인 제공자이지만 동시에 통일의 여정에서 결자해지의 당사자 위치에 있다. 최근 글로벌 파워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거칠게 반영된 시리아 내전 개입, 조지아 전쟁, 우크라이나 침공 등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중 핵심은 크렘린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도움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언제든 방해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이 계속되면 한국의 부담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국력의 총합을 고려할 때 러시아와의 갈등 구도 확대 시 그 안보적 부담은 모스크바보다는 서울이 껴안을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대북 전략적 연대 강화의 하나로 동해에서 북·러 연합군사훈련을 실행한다면, 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에 안보적 경직성을 심화시킬 것이 명약관화하다. 한국이 대만해협을 둘러싼 미·중 갈등에 연루될까 봐 우려스러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해상의 미·러 대립 구도에까지 속박될까 봐 걱정이 앞선다. 당장 북한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서도 북극곰의 역할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대북 제재의 ‘설계자’이자 ‘이행자’이기에 크렘린의 지원과 협력 없이는 북핵 문제의 연착륙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에 ‘기회의 창’ 될 수 있는 러시아
-러시아의 도움 여부 이전에 북핵 문제 해결은 사실상 어려운 상황 아닌가.
“중장기적 관점에서 대러 갈등 관리가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미래 한국의 성장·번영과 결부된 차별화된 러시아만의 지경학(地經學)적 가치 때문이다. 이를테면 북방의 러시아는 무궁무진한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공급원으로서, 향후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는 차세대 또는 차차세대 성장 동력산업 발굴을 위한 원천기술 유입 통로로서, 한국 경제가 중국 경제에 종속되어 가는 것을 예방하는 하나의 대안시장으로서, 한국의 부산과 목포가 유라시아대륙횡단철도망의 기종점(起終點)이 되는 ‘철의 실크로드’로서, 한국의 낮은 식량자급률을 보완해 주는 해외 곡물 생산기지로서, 한국인의 식탁을 책임지는 주요 수산물 수입국으로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후 파괴된 인프라 및 산업시설 재건을 위한 대규모 건설시장으로서, 21세기 새로운 무역로인 북극항로의 주 물류 통로로서 21세기 한국에 다양한 지경학적 ‘기회의 창’을 제공해 준다.”
-한국을 러시아는 어떻게 인식하나.
“ 현시점에서 러시아 역시 다중적 국익 확보를 위해 한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러시아는 경제적 신화를 창조한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대신해 극동 지역 개발과 경제 성장, 특히 산업구조의 고도화 과정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최적의 협력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크렘린 지도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점차 세계 정치경제 질서의 새로운 지리적 중심부로 변해가고 있다는 명료한 인식하에 아·태 지역 세력으로서의 공고한 지정학적 ‘닻’을 내리기 위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낙후된 시베리아·극동 지역 개발에 국가적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다.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 개최, 같은해 중앙부처로 극동개발부의 신설, 2015년 극동 개발을 위한 플랫폼으로 동방경제포럼 창설, 일종의 경제특구로 선도개발구역 조성,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극동 주요 항구의 자유항 선포 등은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가 성장의 내적 동력을 극동에서 찾고 21세기 국가 발전의 중심축을 우랄 너머로 이동해 나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러 경협 절실 러, 갈등불원 외교 신호 계속 보내
-러시아가 극동개발에서 한국에 기대하는 점은.
“문제는 극동 개발에 요구되는 대규모 물적 재원, 기술력,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막대한 해외 투자유치가 절실한 것이다. 현재 러시아는 북방영토 분쟁으로 인해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인하고 경협을 확대하는 데 한계가 있다.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 수준에서 유사 이래 최고의 황금 밀월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중국의 부상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감도 동시에 존재한다. 특히 인구 희박지대 시베리아·극동 지역으로 몰려드는 한족들의 인구 삼투압(滲透壓) 문제에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고, 중국의 과도한 경제적 진출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지정학적 경쟁자인 중·일과의 이런 역학 구도를 고려해 러시아는 한국을 시베리아·극동 지역의 자원개발과 침체한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최적의 자본과 기술 공급원으로 간주하고 한국과의 경협 확대를 바란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한국이 최적의 경협 파트너인 듯하다.
“러시아로서는 지리적 근접성, 제조업에 기반한 강한 근육질의 경제력, 숙련된 노동력, 첨단·선진 기술력, 경제구조의 상호보완성 등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한국만큼 바람직한 경제 파트너를 찾기 힘들다. 특히 푸틴 정부는 러시아 경제의 후진성 극복, 즉 과도한 자원의존형 경제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해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와 혁신 산업 육성을 통한 산업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경제 현대화 과정에 한국이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고 보고 협력을 갈구한다. 여기에는 한국이 러시아 극동 지역의 경제·안보 주권에 위협적이지 않다는 전략적 판단도 포함된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구로부터 가해지는 지옥의 제재에 직면한 상황에서 한국은 더더욱 구애의 대상이다. 이것이 러시아가 한국이라는 기회의 창을 성급하게 닫기 어려운 이유고, 크렘린이 레드라인을 제시하며 한국과의 갈등 확대를 원치 않는다는 외교적 신호를 계속 보내는 배경이다.”
-한·러 협력이 실현되면 침체의 한국경제에도 도움이 될 듯하다.
“종합해서 정리하면 대외지향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한국 경제는 기술과 자원이 풍부한 러시아 경제와 자연적인 상호보완성을 갖고 있다. 러시아는 한국의 경제 배후지로서, 한국은 러시아가 아·태 지역 경제와 결합하는 교두보로서 양국의 지경학적 협력 강화는 상호 경제적 이득을 보장해 준다. 동북아의 역학 구도상 한·러 간에는 지정학적 상보성도 있다. 아시아 패권 경쟁의 두 축인 중국과 일본으로서는 유럽 세력인 러시아가 역내 국제관계의 핵심 행위자로 등장하는 것을 선호할 리 없다. 이질 세력인 러시아가 아·태 지역에서 자국의 영향력과 이익, 위상을 잠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중국과 일본은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에 대한 잠재적 봉쇄 세력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중국과 일본이라는 부담스러운 존재 사이에 있는 한국으로서는 역내 세력 균형상 러시아의 아·태 지역 진출을 제어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한국 외교가 한·러 관계에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할까
“얼마 전 북한의 형제국인 쿠바가 장고 끝에 한국과 수교했다. 이념과 가치가 국익 앞에서는 한낱 외교적 치장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명료히 확인시켜 준다. 세계적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고 더욱이 전쟁의 휘발성이 높은 지정학적 단층 지대에 위치한 한국에 가치 외교는 자기 자신을 옥죄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념과 가치, 감정을 뛰어넘은 노태우 정부의 이른바 ‘북방정책’은 한국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연 대외정치적 거보(巨步)로 평가된다.
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1983년 우리 국적기 KAL 007을 격추했음에도 노 대통령은 냉철하고 집요하게 북방정책을 펼쳐 한국 외교사에 한 획을 그었다. 동맹국 북한의 반발을 무시한 소련의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 1990년 한·소 수교에 이은 동구권 제국(諸國)과의 외교관계 수립, 북방시장의 개척, 신러시아 옐친정부의 친남소북(親南疏北) 노선 등은 모두 북방정책의 거대한 성과로 기록된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에 앞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시 한국은 어떤 입장이었나.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시 서구의 강한 압박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보수정부는 우리의 국익을 고려해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와 60일 무비자 사증면제협정을 맺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한·러 공동으로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행사까지 추진했다. 그런데도 한·미동맹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미동맹이 한국 외교의 근간이고 핵심축이지만 항상 한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만병통치약도 아니라는 점을 명료히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러 관계가 원만할 때 한·미동맹도 건강해지고 공고해진다는 신념의 소산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 외교의 내적 균형 역량이 그런 대외정책 결정을 내린 것이다.”
-외교의 내적 균형 역량이란 무슨 뜻인가.
“외교의 내적 균형이란 외교에서의 자율성 증대를 의미한다. 최근 한국 외교에서 동맹의 딜레마를 헤징(hedging)하는 내적 균형 역량이 약화하는 듯하여 우려스럽다. 동맹은 안보 위협의 최소화를 위해 체결하지만, 동맹이 새로운 안보 위협을 낳거나 가맹국의 이익을 침해할 수도 있다. 동맹이 ‘약’도 되고 ‘독’도 되는 파머콘적 양면성, 이른바 동맹의 딜레마다. 비대칭 동맹의 위계에서 피후견국은 ‘연루(entrapment)’와 ‘방기(abandonment)’의 위험을 운명처럼 안고 산다. 전자는 후견국이 제3국과 분쟁을 벌일 때 휘말리는 위험이고, 후자는 후견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피후견국을 외면하거나 포기할 때 생기는 위험이다.”
-한국 외교의 내적 균형이 왜 중요한가.
“한국 외교가 내적 균형 역량을 스스로 강화하지 않는다면, 동맹의 딜레마, 즉 연루 또는 방기 위험은 커진다. 지금처럼 미·중 세력 전이의 시대라면 더더욱 그렇다. 한·미동맹 일원론적 외교 방식에서 벗어나 대러 관계, 나아가 대중·대일 관계를 신중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해야만 하는 이유다. 사실상의 준동맹으로서 미국의 피후견국인 우크라이나는 미·러의 유라시아 패권 투쟁에 연루되어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고, 이제 방기의 수순을 밟고 있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정권이 선택한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외교, 요컨대 선명한 친서탈러(親西脫露) 노선이 낳은 재앙이다.
한국이 미국의 품 안에서 편승의 이익을 누리던 시대는 지났다.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고 이를 토대로 독자적인 글로벌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의 독자적인 안보와 국익 수호를 위해 노태우와 박근혜 정부처럼 외교적 자율성을 확대해 나가는 강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말하자면 한국 외교의 내적 균형 역량 강화가 시급히 요구된다. 미국의 동맹 사우디와 튀르키예의 외교적 포지셔닝이 하나의 좋은 준거점이 될 수 있다. 국제무대에서 국익은 영원하고 외교는 다양한 스텝으로 끊임없이 춤을 춘다.”
-향후 바라는 점은.
“3년째로 접어든, 끝이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고도 그 냉혹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중동을 넘어 한반도에까지 어른거리는 전쟁의 그림자는 온전히 우리 몫이 된다. 역사적 사례를 숙고하는 좌고우면의 외교적 지혜로 한·러 관계에 틈이 더는 벌어지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국제사회의 시야는 이미 다가오는 11월 미국 대선으로 향해 있다. 거의 확실시되는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럭비공처럼 예측불허로 요동칠 국제 질서의 ‘판’이 벌써 눈 앞에 펼쳐진다. 4년 전 한·미동맹의 수장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시 푸틴을 좋아했고 그와 브로맨스를 과시했다.”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한국외대 대학원 동구지역연구과 석사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학교(MGIMO) 정치학박사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장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장 및 러시아연구소 소장 ▲외교부·국방부 정책자문위원(현)
김청중 기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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