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원 쥐고 창업해 연매출 2600억”…악바리 22살 ‘국내 대표 미용 사관학교’ 키운 비결 [남돈남산]
아버지는 몸이 편찮으셔서 생업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연탄 배달·판매 등을 하면서 가장 역할을 했다. 어머니가 교육을 거의 못 받았기 때문에 그럴듯한 직장에 취업할 수 없었다. 집이 너무 가난했다. 7살에 서울 남가좌동에 있는 판자촌에 들어가서 중학생 때까지 살았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집안 형편 때문에 하루라도 먼저 돈을 벌어야했다. 17살에 미용업계에 뛰어들었다. 22살이었던 1982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 성신여자대학교(성신여대) 부근에 ‘준오헤어’ 1호점을 개관하고 창업가로 변신했다. 맨손에서 시작해 우리나라 ‘미용업계의 살아있는 전설’, ‘성공한 여성 기업인’으로 불리게 된 강윤선 준오뷰티 대표의 이야기다.
미용실 이름이 ‘준오(JUNO)헤어’이고, 준오헤어를 운영하는 기업명이 ‘준오뷰티’이다. 준오(JUNO)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 신의 부인인 여신 헤라(HERA)의 로마신화식 표기로 여신 중의 여신, 결혼의 여신을 의미한다.
지난달 말 기준 준오헤어의 매장은 173개이다. 준오뷰티는 올해 1월 필리핀에도 매장을 냈다. 해외 첫 매장이다. 올해 상반기에 태국에도 매장을 낼 예정이다. 지난해 기준 준오헤어 매장 전체 매출액은 약 2600억원에 달한다. 강 대표는 경쟁이 치열한 미용업계에서 어떻게 성공했을까. 강 대표를 만나 성공 비결을 들어봤다.
미용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기술 익혀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불에 달군 연탄집게를 이용해 친구들에게 파마를 해줬어요. 예전에는 길에 아카시아 잎이 흔했는데, 친구들에게 아카시아 잎으로 머리 장식을 해주거나 잎을 이용해서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연출해줬어요.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라 그냥 알아서 깨우쳤던 것 같아요.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이런 말이 있죠? 저는 수저가 아예 없었어요. 무수저 출신입니다. 집안 형편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했어요. 머리카락 만지는 게 재미있으니까 미용실 문을 두들겼죠.”
강 대표는 절실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미용기술을 빠르게 익혔다.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파마하는 것은 물론 신부 화장(메이크업), 손톱 손질(지금의 네일아트) 등 전반적인 미용 분야에 관해 금방 습득했다. 잠을 줄여가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가난할 것만 같았다. 당시 미용사 월급은 턱없이 적었고, 미용사가 대접받는 시대도 아니었다. 강 대표가 22살이었던 1982년 성신여자대학교 부근에 1호점을 내고 창업가가 된 이유다.
“수중에 돈이 50만원이 전부였기 때문에 1층이 아닌 2층에 보증금 2000만원짜리 매장을 구했어요. 당시 2층에 자리 잡은 미용실은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2층에 미용실을 내면 손님들이 안 갔거든요. 건물주에게 앞으로 돈을 벌면서 보증금을 갚을 테니 무작정 매장을 내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간절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건물주가 일수하던 분이었는데, 선이자를 떼고, 매일 이자와 원금을 갚는 조건으로 매장을 냈습니다.”
패기와 열정은 충만했지만 매장에 손님은 거의 없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거리로 나가 직접 매장을 홍보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의 매일 성신여대 일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준오헤어라고 머리 엄청 잘하는 곳이라고 하던데, 매장이 어디에 있어요? 아세요’라며 길을 묻는 척 했어요. 성신여대 안에 들어가서도 물어봤어요. 저만 계속 하면 안 되니까 지인한테 부탁해서 지인들도 똑같이 행동하게 했어요. 준오헤어가 머리를 정말 잘하는 미용실이라고 제가 스스로 입소문 낸 거죠.”
강 대표는 또한 미용실 건물 외벽에 ‘지구를 한 바퀴 돌더라도 저희가 매만진 머리가 결코 부끄럽지 않게 하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플래카드)을 크게 걸었다. 먼 곳에서도 준오헤어가 눈에 띌 수 있도록, 준오헤어 매장 부근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준오헤어에 호기심을 갖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강 대표의 전략은 적중했다. 준오헤어를 찾는 사람들이 빠르게 증가했다. 강 대표는 준오헤어 1호점을 낸지 3년 만에 1호점 주변에 매장 2개를 더 냈다. 강 대표는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일에만 전념했다. 성장가도를 달리던 준오헤어에 위기가 찾아왔다. 1988년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직원들이 단합하고 파업을 선언했다.
“매장 3곳의 모든 직원들이 갑자기 당장 월급을 올려달라며 올려주지 않으면 오늘부터 일을 안 하겠다며 저를 협박하더라고요. 직원들 요구대로 당장 월급을 올려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반복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저는 28살이었고, 어차피 빈손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기 때문에 다 버려도 상관없었어요. 직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미용실 3곳 모두 문을 닫고 사업을 접고 시골에 가서 농사짓고 살겠다’고.”
강경한 강 대표의 모습을 본 직원들을 화들짝 놀랐다. 가게 문을 닫으면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실천하는 강 대표를 보고 직원들을 강 대표에게 용서를 구했다. 강 대표는 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했고, 사건은 잘 마무리됐다. 이후 그는 직원들에게 월급도 올려줬다.
두 번째 위기는 1992년 이화여자대학교(이대) 부근에 이대1호점을 냈을 때 닥쳤다. 돈암동 매장 3곳이 승승장구하면서 ‘미용·패션 1번지’로 불리던 이대 부근에 매장을 냈지만, 찾아오는 손님들이 거의 없었다. 당시 이대에는 많은 미용실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강 대표는 또 한 번 거리로 직접 나가는 전략을 취했다.
“매일 아침 수 십 명의 여자 직원들이 같은 옷을 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서울지하철 2호선 이대입구역과 이대 부근에 서서 큰 목소리로 다 같이 ‘안녕하세요’를 외치면서 준오헤어를 알렸어요. 눈에 띌 수밖에 없었어요. 몇 달 동안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이대생들에게 준오헤어가 당연히 알려지게 됐죠. 이대1호점을 내고 6개월 후부터 손님이 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직원들 데리고 영국 유학 길 올라
“미용사들은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아주 훌륭한 일을 하는데 왜 우리나라 미용사들은 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할까. 미용사들은 왜 자부심을 갖고 일을 하지 않을까. 안타까웠습니다. 1993년 직원들을 데리고 미용 선진국인 영국으로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죠.”
1993년 당시 유부녀였던 강 대표는 남편 명의로 돼 있으면서 같이 살던 집을 남편 몰래 부동산에 팔겠다며 내놨다. 집을 판 돈을 갖고 영국에 가서 직원들에게 첨단 미용 기술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강 대표의 남편은 어차피 자신이 강 대표를 말려도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강 대표 결정을 따랐다. 강 대표는 1993년 직원 약 20명을 데리고 2달 동안 영국 비달사순 아카데미로 유학을 갔다. 귀국해서 살 집도 없었지만 뒷일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직원들에게 유학 다녀온 후 일정 기간 근무를 해야 하는 등 어떤 조건도 걸지 않았어요. 유학 다녀온 후 얼마 안 돼서 퇴사한 직원도 있었으니까요. 당시 화폐 기준으로 직원들 유학비용으로 쓴 돈만 2억원이 넘어요. 교육의 파급력은 엄청났어요. 직원들의 미용 기술력은 물론 자부심이 매우 높아졌어요. 누가 봐도 준오헤어 미용사들은 우리나라 미용업계 1등 미용사가 됐죠.”
강 대표는 직원들의 사기를 더 끌어올리고 준오헤어 미용사들이 더욱 성장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1994년 첫 ‘헤어쇼’를 개최했다. 준오헤어에 미용사로 입사하면 약 2년 반 동안 인턴부터 시작한다. 인턴들은 미용 업무를 익히면서 동시에 체계적으로 구성된 미용 교육을 받는다. 그렇게 2년 반 정도 교육이 끝나면 비로소 미용사 즉 헤어 디자이너가 된다. 인턴들이 헤어 디자이너가 됐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공식 행사가 ‘헤어쇼’이다.
“준오맨들이 자긍심·자부심 그리고 준오헤어에 소속감을 갖게 하면서 모든 면에서 최고의 헤어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헤어쇼를 열기 시작했어요. 올해 4월 60회가 개최될 예정입니다. 준오 헤어쇼의 명성이 커지면서 여러 국가에서 손님들이 와요. 한 번 열면 거의 4000명 정도 옵니다.”
준오헤어의 성장 비결
“책은 시공을 초월하면서 2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다방면의 전문 지식을 압축적이고 빠르게 습득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1995년부터 매주 넷째주 토요일 오전 7시~9시에 전 직원들이 모여서 독서 토론합니다. 준오헤어 임직원 혹은 제가 책을 미리 선정하고 읽어오죠. 예전에는 회사가 직원들의 책값을 다 지원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책을 안 읽는 직원들이 많더군요. 몇 년 전부터는 회사가 책값의 절반을, 나머지는 개인이 내는 구조로 바꿨어요. 돈이 아까워서 그런지 이제는 직원들이 책을 잘 봅니다.”
강 대표는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를 높이기 위해 1996년 약 1억원을 들여 CI(Corporate Identity)를 바꿨다. 미용사들이 월급이 적다는 사회적인 통념을 깨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기 위해 고액 연봉 제도도 오래 전에 도입했다. 준오헤어의 디자이너는 약 1600명에 달한다. 이 중에 1년에 연봉 1억원 이상(인센티브 포함)을 받는 디자이너들이 약 300명이다. 이 같은 노력이 맞물리면서 준오헤어는 나날이 성장했다.
준오뷰티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준오뷰티가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회사가 되는 것이다.
“준오헤어가 지금까지 성장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교육인 것 같아요. 회사가 직원들을 성장시켜줄 의무감은 없지만, 직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제가 직원들에게 ‘준오헤어는 성장이 전부다’라고 자주 말해요. 사람은 강가에 매워놓은 배와 같아요. 노라도 저어야 배가 제자리에 있을 수 있죠. 아무것도 안 하면 배는 뒤로 갑니다. 즉 도태됩니다. 성공까지는 모르겠지만 준오맨들은 무조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제 역할입니다. 그리고 ‘샤넬’ ‘에르메스’처럼 준오헤어를 세월이 흘러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고 싶어요.”
신수현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의사 관두고 용접이나” 발언에…용접협회장 “용접이 우습나” - 매일경제
- 오타니 거짓말했다…평범하다던 미모의 아내, 놀라운 과거 ‘깜짝’ - 매일경제
- 손흥민 이어 오타니 초청에 수백억 ‘펑펑’...온라인 유통제왕 쿠팡의 속셈 [소비의 달인] - 매
- 이재명“차점자, 우승자 안돼”…박용진“순천은 되고 강북은 왜 안 되나” - 매일경제
- “초등 담임 고작 8시간 일하나”…대기업맘, 되레 뭇매 - 매일경제
- “건물주가 마음대로 세입자 구해 왔어요”…내 권리금 어찌하오리까 - 매일경제
- ‘난교 발언’ 논란 장예찬…결국 공천 취소됐다 - 매일경제
- [속보] 與, ‘막말 논란’ 장예찬 부산 수영 공천 취소 - 매일경제
- “‘2000명’ 먼저 풀어야…지속되면 국민건강 돌이킬 수 없는 피해” - 매일경제
- 괴물과 처음 마주친 꽃도 놀랐다 “류현진 구속이 벌써 148km라니…한 번 본 게 큰 도움 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