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정책목표에 ‘고용 안정’ 추가 무산… 학계 의견도 분분
美·EU 등 주요국, 중앙은행 목표에 ‘고용안정’ 명시
학계서도 찬성·반대 팽팽… “장기적으론 도입필요”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목표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자는 내용으로 발의됐던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21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될 전망이다. 이를 두고 학계의 의견은 분분하다. 한은의 책무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한은의 독립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있는 것이다.
1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은행의 책무에 물가안정 외에 고용안정을 추가하자는 취지로 발의한 개정법률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해당 안건은 2021년 11월 경제재정소위에 상정됐지만, 검토가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통과되지 못했다. 5월 말 21대 국회가 마무리되면 자동 폐기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 ‘고용 안정 추가’ 한은법 개정안 3건… 모두 국회 계류 중
21대 국회에서 한은의 책무에 고용안정을 추가하자는 목소리는 여러 번 나왔다. 양 의원 발의에 앞서 2020년 류성걸 국민의힘 의원도 한은법 1조에 고용안정을 추가하자는 개정안을 내놨고, 비슷한 시기에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같은 내용의 안건을 냈다. 두 안건 모두 양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과 같이 경제재정소위에서 논의됐지만 역시 통과하지 못했다.
고용 안정의 중요성은 한국의 일자리 부족 문제가 심화하면서 커졌다.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면서 이전과 같은 고성장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 기술발전으로 ‘고용 없는 성장’ 현상까지 겹친 여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한 뒤에는 이런 주장에 더욱 힘이 실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유럽중앙은행(ECB) 등 주요국 중앙은행이 고용안정을 책무로 내세우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했다. 연준은 통화정책의 목표를 ‘물가 안정’과 ‘최대 고용’으로 삼고 있으며, 코로나19 확산 이후에는 무게추를 물가에서 고용으로 옮기도 했다. ECB는 고용을 물가안정의 ‘부속 목표’로 명시하면서 사실상 물가와 고용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는 중앙은행의 책무에 고용안정을 추가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한국은행법 1조에서 물가 안정 외에도 금융 안정을 주요 책무로 명시하고 있어, 고용안정까지 추가하면 정책 결정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 주된 이유로 지목된다. 예컨대 고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면 가계부채가 급증해 고용 안정과 금융 안정이 엇박자가 날 수 있다.
한은법에 고용목표가 추가되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침해될 가능성도 있다. 통화정책 수단만 보유한 상태에서 고용 안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재정 수단을 가진 정부나 입법권이 있는 국회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노동시장이 유연하지 않아 정책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다. 금리를 낮춰 경기를 부양하더라도 사업주들이 해고가 어려운 점을 감안해 고용을 쉽게 늘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 학계 의견도 분분… “연준도 고용안정 추구” vs “한은 독립성 저해”
이런 이유로 학계에서는 찬성과 반대 의견이 팽팽하다. 지난 2021년 6월 한은이 국내 경제학과 교수 4명(김진일 고려대 교수, 신관호 고려대 교수, 장용성 서울대 교수(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하준경 한양대 교수)에게 의뢰해 진행한 연구용역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드러났다. 당시 저자 중 2명은 고용안정을 추가하는 것에 동의했고, 2명은 반대했다.
김진일 교수와 하준경 교수는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용안정을 추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반면 신관호 교수와 장용성 교수는 한은의 정책수단이 금리 등으로 제한된 상태에서 고용안정 목표까지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어려우며, 때로는 서로 상충되는 결과를 낳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반대했다.
학계에서는 한국은행이 장기적으로는 고용안정을 주요 책무로 추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계속 나오는 상황이다. 류덕현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한은의 역할을 소극적으로 제한하는 것보다는 (설립목적에)고용안정 또는 고용 창출을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면서 “지금은 통화정책이 물가 안정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고용안정이 추가되면 한은도 정책 운용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고 했다. 김진일 교수도 “조금 이르더라도 한은이 고용 안정 책무를 추가해서 정책 운용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도 “장기적으로는 미국 등 선진국처럼 중앙은행의 책무에 고용 안정을 추가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다만 그는 “지금 장기적인 과제를 생각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면서 “고용 안정을 추가하려면 한은의 독립성이 더욱 강해져야 하는데, 아직은 한은이 기획재정부 등 정부의 정책방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기존 책무인 금융정책이나 통화정책을 책임감 있게 추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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