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금지 어기고 美 마이크론 이직한 SK 전 연구원…“하루 1000만원 배상” [민경진의 판례 읽기]

2024. 3. 1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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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의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 인용
급증하는 반도체 기술 해외 유출에 철퇴

[법알못 판례 읽기]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사진=연합뉴스



법원이 미국 반도체회사 마이크론 임원으로 이직한 SK하이닉스 전 연구원에 대한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며 위반 시 하루에 1000만원을 지급할 것을 결정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쥐려는 글로벌업계 경쟁이 한층 치열해진 가운데 법원이 국가 산업 경쟁력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기술 유출 범죄를 엄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성능 메모리다.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으로 꼽힌다.

 

 법원 “전직금지 위반…SK 경쟁력 훼손”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50부는 2024년 3월 SK하이닉스가 전직 연구원 A 씨를 상대로 낸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고 “위반 시 하루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채무자(A 씨)는 오는 7월 26일까지 마이크론과 각 지점, 영업소, 사업장 및 계열회사에 취업 또는 근무하거나 자문계약, 고문계약, 용역계약, 파견계약 체결 등의 방법으로 자문, 노무 또는 용역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이 판결 당시 A 씨는 마이크론 본사에 임원 직급으로 입사해 재직 중이었다.

2001년 SK하이닉스에 입사한 A 씨는 메모리연구소 설계팀 주임 연구원, D램설계개발사업부 설계팀 선임연구원, HBM사업 수석, HBM 디자인부서 프로젝트 설계 총괄 등을 맡다가 2022년 7월 퇴사했다.

그는 SK하이닉스 근무 당시인 2015년부터 SK하이닉스와 매년 ‘퇴직 후 2년간 동종 업체에 취업하지 않는다’는 정보보호서약서를 썼고, 퇴직 무렵에는 전직 금지 기간(2년) 등이 기재된 전직금지 약정서 및 국가 핵심기술 등의 비밀유지 서약서를 작성했다. 약정서에는 마이크론 등 전직금지 대상이 되는 경쟁업체가 구체적으로 나열됐다.

하지만 A 씨가 SK하이닉스를 퇴사하고 얼마 안 돼 마이크론에 임원 직급으로 입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SK하이닉스는 2023년 8월 법원에 A 씨에 대한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해외 거주 중인 A 씨에 대한 송달 지연 등으로 7개월 만에 가처분 결정이 나왔다.

재판부는 A 씨가 SK하이닉스에서 알게 된 정보가 유출될 경우 SK하이닉스의 경쟁력 훼손이 불가피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채무자가 재직 시 담당했던 업무와 채무자의 지위, 업무를 담당하며 지득했을 것으로 보이는 채권자(SK하이닉스)의 영업비밀과 정보, 재직 기간, 관련 업계에서의 채권자의 선도적인 위치 등을 종합하면 전직금지 약정으로써 보호할 가치가 있는 채권자의 이익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채무자가 지득한 정보가 유출될 경우 마이크론은 동종 분야에서 채권자와 동등한 사업 능력을 갖추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상당 기간 단축할 수 있는 반면 채권자는 그에 관한 경쟁력을 상당 부분 훼손당할 것으로 보이는 점, 정보가 유출될 경우 원상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한 점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가처분 명령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해 간접강제를 명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HBM 시장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마이크론은 지난 2월 26일(현지 시간) 1, 2위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보다 먼저 5세대 HBM인 HBM3E 양산 소식을 알리며 업계에 충격을 줬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해온 4세대 HBM인 HBM3 개발을 건너뛰고 5세대 양산을 시작한 것이다. 산업계에선 A 씨가 SK하이닉스에서 4세대 HBM 개발에 관여한 만큼 그가 마이크론으로 이직하면서 관련 핵심기술도 이미 넘어간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욜그룹은 HBM 시장 규모가 올해 141억 달러(약 19조원)에서 5년 후인 2029년 377억 달러(약 50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대해 “HBM을 포함한 D램 설계 관련 기술은 국가 핵심기술에 포함되기에 법원의 판결은 적법하며 환영한다”고 했다.

SK하이닉스 HBM3 24GB. 사진=SK하이닉스



 

 급증하는 기술 유출 범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핵심기술 유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사건은 23건으로 이 중 절반 이상인 15건이 반도체 분야였다. 반도체 기술 해외 유출 적발 사건은 2020년 6건, 2021년 5건, 2022년 9건이었으나 지난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에는 삼성전자 임원 출신인 B 씨가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인 반도체 공장의 설계 도면, 공정 배치도 등을 빼돌려 중국에 ‘복제 공장’을 세우려다가 적발됐다.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 전 연구원 등은 반도체 불량을 줄이는 ‘초임계 반도체 세정 장비’를 중국에 불법 수출하고 기술 도면까지 넘긴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다른 업체로 이직을 준비하던 삼성전자 엔지니어가 국가 핵심기술이 들어 있는 자료를 모니터 화면에 띄워놓고 이를 사진 촬영해 보관하다 적발된 사례도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기술 유출 범죄는 증명이 어렵고 밝혀내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린다”며 “범죄자로선 받게 될 처벌에 비해 범죄 행위로 얻는 금전적 수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돋보기]
 

 기술 유출 양형 기준 확 높인다

반도체 등 국가 핵심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면 최장 징역 18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양형기준이 대폭 강화된다.

그간 산업기술 유출 범죄는 양형기준이 지나치게 낮아 범죄 억제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그동안 기술 유출 범죄는 ‘영업비밀 침해행위’로 분류되면서 5개월 이상의 징역, 최대 9년 형이 적용돼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최근 국가 핵심기술 등이 국외로 침해(유출)된 경우 최대 18년 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권고했다. 새로운 양형기준에 포함된 산업기술의 국내 침해는 최대 권고 형량을 기존 6년에서 9년으로, 국외 침해는 기존 9년에서 15년으로 상향했다.

초범이라는 점을 주요 참작 사유에서 제외하는 등 판사가 징역형의 집행을 쉽게 유예하지 못하도록 권고했다. 양형위는 “영업비밀 및 기술 침해 범죄는 대부분 초범에 의해 발생한다”며 “형사처벌 전력 없음을 집행유예 주요 참작 사유에서 제외한다”고 설명했다.

양형기준은 일선 판사들이 판결할 때 기준으로 삼는 가이드라인이다. 범행 경위와 결과, 상습성, 피해회복 여부 등 판단에 어떤 내용을 고려할 것인지(양형 인자)를 규정하고, 이에 따른 권고 형량 범위를 감경·기본·가중 3개 영역으로 나눠 제시한다.

아울러 양형위는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는 미성년자 대상 마약 매매, 혐오성 스토킹 등에 대한 양형기준도 대폭 상향한다. 특히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마약류를 판매하거나 10억원 넘는 마약을 유통할 경우 최대 무기징역까지 선고하도록 권고했다.

대마 관련 행위에 대해서도 기존보다 무겁게 처벌하도록 했다. 대마를 투약하거나 소지만 해도 가중영역 형량 범위가 10월~2년에서 1~3년으로 상향된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타인에게 마약류를 제공하거나 다른 범죄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면 가중 처벌 요인으로 삼도록 했다.

스토킹 범죄는 일반 유형은 최대 3년, 흉기를 휴대하면 최대 5년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양형기준을 상향했다. 혐오범죄가 특별가중 사유가 되는 점을 명확히 했다. 대법원은 3월 25일 양형위 전체회의에서 새로운 기준을 최종 의결할 예정이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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