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원숭이처럼 생체실험한 '악마의 의사들', 전쟁 뒤 더 잘 나갔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2024. 3. 1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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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3]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⑫

살아 숨쉬는 '마루타'의 몸에 세균을 집어놓고 언제 어떻게 죽는지를 살피는 행위를 '의학연구'라 우길 수는 없다. 731부대의 생체실험은 '의학'의 이름을 훔친, 또는 의학과 '악마적 동맹'을 맺은 잔혹행위이자 야만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를 비롯한 731부대 군의관들을 '악마의 의사' 집단이라 비난해왔다.

전쟁 뒤에도 잘 나갔던 악마의 의사들

전쟁이 끝난 뒤 이시이 패거리들은 의대 교수나 개업의사, 또는 기업인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살았다. 소련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이나 중국 선양 전범재판의 피고석에 섰던 일부 731부대 간부들을 빼고 말이다(소련과 중국에서의 731부대 관련 재판은 연재 55 참조). 이시이 일당은 미국과의 '더러운 거래'를 거쳐 의사면허 박탈도 비껴갔다. 형사 처분은커녕 731부대 고급장교들은 제법 액수가 많은 군인연금, 일본쪽 용어로는 일왕이 은혜를 베풀어 준다는 뜻을 지닌 '은급'(恩給)을 받았다.

그들은 의과대학 교수나 거대 제약회사의 연구원으로 일자리를 쉽게 찾았다. 만주에서의 전쟁범죄 이력은 그들에게 크게 도움이 됐다. 세균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숱한 사람들을 죽이면서 인간의 신체구조, 혈액 응고 등 (생체실험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지식과 손기술을 갈고닦은 것이 그들의 인생 후반부를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이끌었다.

사회경제사 전공자로 이름이 알려진 마쓰무라 다카오(松村高夫,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오래 전부터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파헤쳐온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다.〈論争 731部隊>(晩声社, 1994), <大量虐殺の社会史>(ミネルヴァ書房, 2007)를 비롯해 731부대에 관한 여러 권을 책을 냈고, 일본 검정교과서에 731부대의 죄악상이 제대로 실려야 한다는 주장을 줄곧 펴왔다.

마쓰무라 교수는 게이오대 학술지에 실은 731부대 관련 논문('731부대의 세균전과 전시·전후 의학')에서 '일본 의학계가 독일과는 달리 지난날의 전쟁범죄에 대해 아무런 비판적 판단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松村高夫, '731部隊による細菌戦と戦時·戦後医学', 三田學會雜誌, 106권 1호, 2013년 4월). 이 글 속에서 마쓰무라가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731부대 출신들이 패전 일본의 의학계에서 퇴출되기는커녕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요직들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표 1> 참조).

▲ <표 1>. 731부대 간부 출신들의 패전 뒤 직업 현황.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고 아무런 제약 없이 학계와 기업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펴나갔다. ⓒ松村高夫

이시이 시로의 '지배인' 나이토 요이치

731부대를 중심으로 '방역급수부'로 위장했던 중국의 여러 부대들을 '이시이 기관'이라 했음은 지난 글에서 살펴봤다(연재 55). 100부대(장춘), 1855부대(베이징), 1644부대(난징), 8604(광둥), 9420부대(싱가포르)와 도쿄 육군군의학교 방역연구실을 합친 것이 '이시이 시관'이었다.

1만 명 규모에 이르렀던 '이시이 기관' 출신 가운데 패전 뒤 가장 많이 돈을 번 자를 꼽으라면 나이토 료이치(内藤良一, 1906-1982)다. 군의 중령 출신인 나이토는 이시이 시로의 오른팔로 일컬어졌던 2명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하나는 731부대 제3부장으로 방역급수를 맡았던 마스다 토모사다(增田知貞, 군의대좌)였다. 마스다와 나이토 둘 다 이시이의 교토제국대 의학부 후배들이다. 1945년 패전 뒤 둘의 운명은 크게 엇갈렸다. 마스다가 패전 뒤 숨어 살다가 1952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과는 달리, 나이토는 의료기업인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나이토는 일찍이 독일 코흐연구소에서 세균학을, 미국 펜실베니아대에서 혈액동결 건조기술을 익혔다. 이시이가 731부대의 기틀을 다진 뒤 일본 육군 1군 군의부장을 거쳐 도쿄 육군 군의학교 방역연구실장으로 있을 때 바로 그의 밑에서 최측근으로 있었다. 나이토는 '이시이 기관'의 하나였던 싱가포르 방역급수부((9420부대) 부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지난 글에서 2023년 79세에 타계한 일본의 사학자 츠네이시 케이이치(常石敬一, 가나자와대학, 과학사)에 대해 짧게 살펴봤었다. 그는 몇 안 되는 731부대 추적자 가운데 선구적인 인물이다. 1981년 <사라진 세균전 부대>(消えた細菌戦部隊-関東軍第731部隊, 海鳴社)란 연구서를 냈고, 2005년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맥아더사령부 정보(G-2) 책임자 찰스 윌로비 준장이 보고한 기밀문서를 찾아냈다. 그 문서에는 3차 조사관인 노버트 펠이 15만~20만 엔이란 적은 비용으로 세균정보를 손에 넣었다는 내용을 담았다(연재 60 참조).

츠네이시 교수는 1981년 나이토가 죽기 1년 전에 그를 만나 인터뷰한 글을 저널에 실었다. 글 제목은 '군사연구 속 과학자-731부대의 과학자와 그 현대적 의미'다. 이 글에서 츠네이 교수는 이시이 시로와 나이토 료이치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만주 제731부대는 큰 사단 하나의 몫에 해당하는 1만 수천 명 규모의 '이시이 기관'이라는 조직의 일부다. 이시이 기관을 통괄하고 있던 곳은 도쿄의 육군 군의학교 방역연구실이었다. 그 연구실의 주간이 이시이 시로 군의관 소장이었고, 그 지배인을 자처하고 있던 인물이 나이토 료이치 군의관 중령이었다](常石敬一, '軍事研究の中の科学者: 731部隊の科学者とその現代的意味', <学術の動向>, 2017년 7월호)

731부대원들, 한국전쟁으로 돈방석

나이토는 731부대 출신들과 손을 잡고 '일본혈액은행'이란 이름의 제약사를 만들었다. 6명의 이사 가운데 3명이 731부대와 관련된 자들이다. 대표이사 나이토 료이치, 그리고 2명의 이사 미야모토 코이치, 니키 히데오다. 미야모토는 이시이가 특허를 냈던 이시이식 정수기를 생산 판매했던 '일본특수공업' 사장 출신이고, 니키 히데오는 731부대 결핵반 반장 출신의 의사다. 회사가 설립되면서 731부대 출신들이 더 많이 들어와 함께 일했다. 오사카에 본부를 둔 이 회사의 도쿄 공장장이 키타노 마사지(北野政次, 2대 731부대장)였다.

일본혈액은행은 한국전쟁 특수로 재미를 봤다. 부상병들에게 긴급 수혈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군 납품으로 떼돈을 벌었다. 한반도의 불행이 731전범자들에게 돈벌이 기회였다는 것은 참 씁쓸하다(혈액은행은 훗날 일본 녹십자사의 모체가 됐다. 녹십자사는 1980년대에 대형 의료사고를 일으켰다. 에이즈균에 오염된 피를 혈우병 환자 수천 명에게 판매했던 사건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에서만 2600여명이 에이즈에 감염돼 500명 넘게 죽었다).

옛상관을 문전박대한 나이토

츠네이시 교수가 1981년 11월1일 나이토를 만나러 그의 집에 갔을 때의 얘기를 들어보자. 나이토는 메모지에다 연필로 다음의 '성과'를 미리 적어놓고 있었다. 건조인혈장(수혈 대용), 여수기, 페니실린, BCG, 페스트 백신, 발진티푸스 백신, 콜레라 백신, 파상풍 혈청...

나이토는 자신의 이러한 '성과'들이 20세기 후반 일본 국민의 건강 유지에 공헌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세균전을 비판해온) 츠네이시의 시각에서는 나이토의 주장은 그야말로 나중에 꿰맞춘 '결과론'이었다. 처음엔 세균무기를 개발하려는 군사적 목적을 갖고 연구개발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체실험에서 유효성이 확인된 세균과 혈액 정보를 1945년 패전 뒤에 민간사업용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여기서 '생체실험이 없었다면, 혈액은행도 없었다'는 논리가 나온다.

나이토는 생체실험에 관한 한 나름의 발언권을 지닌 옛상관 이시이 시로 몰래 혈액은행을 창업했다. 이시이와는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았다. 혈액은행의 사업이 잘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시이가 나이토를 찾아와 취업 청탁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나이토는 츠네이시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를 쫓아냈다'는 말까지 했다.

[나이토가 있는 곳(혈액은행 대표이사실)으로 이시이 시로가 달려가, 자신을 고용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나이토는 그를 쫓아버렸다고 했다. (제2대 731부대장) 키타노씨는 겸허한 사람이었기에 도쿄 공장일을 맡겼지만...이라 말했다](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490-491쪽).

키타노가 맡았다는 '도쿄 공장일'이란 일본녹십자사 도쿄지사장을 가리킨다. 같은 731부대장을 했어도 키타노와는 달리 이시이는 (교토대학 후배인) 나이토에게 푸대접을 받았다. 이로 미뤄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부하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진 못했던 듯하다.

미 데트릭 기지에서 세균전 강연

옛부하 나이토로부터 문전박대를 겪긴 했지만, 이시이 시로는 군인연금 덕에 쪼들리진 않았다. 악명 높은 '731부대장'이라는 사실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받긴 했지만, 외롭지도 않았다. 그 누구보다 미국의 세균전문가들이 이시이를 필요로 했다. 그들은 이시이의 '세균전' 관련 정보를 높이 평가했다. 이시이는 미 메릴랜드주의 데트릭기지로 초청 받아 강연을 하며 미국의 세균전력에 나름의 힘을 보탰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이시이는 도쿄 신주쿠의 자택으로 찾아온 미 데트릭 기지의 세균전 전문가들에게 그 나름의 세균전 강의를 했었다. 생물무기(BW) 공격과 방어, 그 사용방법에 대한 전략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면서, "BW에 관한 지식이라면 책으로 몇 권이나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했었다(연재 60 참조).

이시이가 데트릭 기지로 초청 받아 갔을 때 어떤 강연을 했는지는 자료가 없어 알기 어렵다. 자료가 없진 않을 테지만 비공개 문서로 묶여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다. 짐작을 해본다면, 이시이가 지난날 미국과 '더러운 거래'를 하면서 약속했던 사항들(이를테면, 추운 날씨에 세균무기를 사용하는 방법 등)을 중심으로 세균전에 관한 자신의 전술·전략적 아이디어를 미국의 세균전 전문가들과 공유했을 것이다. 6.25 한국전쟁 때 미군 세균전문가들과 함께 한반도를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미국의 세균전쟁을 다루는 글에서 다시 살펴볼 예정임).

▲ 2015년 8월15일 하얼빈 남쪽 핑팡 지역에 문을 연 '731부대 죄증진열관'. ⓒ김재명

▲ A4 용지 크기의 문서엔 731부대 연구원들이 미국에 건네준 세균전 정보가 적혀 있다. ⓒ김재명

죽을 때까지 용서 빌지 않았다

이시이는 1959년 10월 국립 도쿄제일병원에서 후두암 수술을 받은 뒤 목소리를 잃고 지내다 곧 숨졌다. 장례식은 월계사에서 치러졌다. 731부대 출신 전범자들이 옛 상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장례 위원장은 이시이에 이어 731부대장을 맡았던 키타노 마사지였다.

이시이는 죽기 전에 신주쿠 집 가까이에 있는 '월계사'란 이름의 절에 자주 다니며 그곳 스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가톨릭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가톨릭 신부와도 자주 만났다고 한다. 냉혹한 '악마의 의사'가 죽음을 앞둔 나이에 나름 죄의식을 뒤늦게나마 느꼈을까.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았다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했을 죄의식마저 없애주진 못했을 것이다. 종교인들과의 만남으로 그 나름 속죄의 길을 찾아보려 했을까. 그러기엔 '죄의 무게'가 너무나 컸기에 엄두를 못 냈을 듯하다.

이시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준 생체실험이라는 더러운 기록을 남기고 갔다. 그가 말년에 종교인들을 만나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 고해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범죄에 대한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게 용서를 빈 적이 없다.

731부대 경력 숨기고 개업

731부대에 근무했던 군의관들 가운데는 패전 뒤 일본으로 돌아가 의과대학 교수나 개업의로 이름을 날렸다. 외과수술 솜씨가 뛰어나다는 입소문이 나서 떼돈을 번 자들도 생겨났다.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거듭하면서 손에 익힌 칼잡이 솜씨다. 이들은 731부대, 또는 범위를 넓혀 '이시이 기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저 만주나 중국 본토를 가리키는 북지(北支), 중지에서 근무했다고 약력에 적어놓기 일쑤였다.

이케다 나에오(池田苗夫, 1902-1990, 군의중좌)의 경우를 보자. 1929년 니가타의대(新潟医大)를 나온 이케다는 731부대 출신 경력을 숨기고 개업의로 돈을 벌었다. 그가 731부대원이 된 것은 1941년 가을부터였다. 그의 과거를 파헤친 글을 보면, 패전 뒤 그가 직접 작성했다는 약력에는 731부대 이름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다케우치 지이치, 하라 후미오, 이 두 공동필자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밝히고 사죄와 더불어 배상을 해야 한다는 양심적 일본의료인단체인 오사카보험의협회 간부들이다).

[1930-1945년까지 만주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에 군의로 참전. 만주 각지와 북지, 중지, 쿠릴열도 등에서 제1선 군의로 항공대, 선박대, 연구기관에서 군진의학 연구에 종사하며 귀중한 체험을 했다](15년전쟁과 일본의학의료연구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293쪽).

"논문엔 원숭이라 썼지만, 그건 마루타야"

1980년대 초 일본 사회에선 수십 년 동안 쉬쉬 하며 감춰져 왔던 731부대의 추악한 전쟁범죄가 조금씩 드러나던 시기였다. 1981년 5월엔 일본의 사학자 츠네이시 케이이치(常石敬一, 가나자와대, 과학사, 2023년 타계)가 <사라진 세균전 부대>(消えた細菌戦部隊-関東軍第731部隊, 海鳴社)란 제목의 연구서로 그때껏 731부대의 흑역사를 잘 모르던 많은 일본 시민들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연재 60 참조). 같은 해 9월엔 소설가이자 다큐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가 <악마의 포식>(悪魔の捕食, 角川文庫)을 출판해 731부대가 잔혹한 전쟁범죄 집단임을 널리 알렸다.

이렇게 일본인들 사이에 '731'이란 용어가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던 무렵인 같은 해 10월16일 <마이니치(每日)신문>에는 '나는 생체실험을 했다-세균부대 전직 군의의 고백'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실명이 아니라 'A 전직군의'란 가명으로 나온 이 고백 기사에는 미국에게 세균전 자료를 내주고 전쟁범죄를 없던 일로 하는 면책협상이 있었고, 사람을 '원숭이'처럼 다루며 생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전쟁 중에 중국인들에게 유행성 출혈열 바이러스를 주사하거나 해서 감염시키는 생체실험을 나도 직접 했다. 731부대에서는 중국인 죄수들을 '마루타'라 부르며 실험에 사용했어. 논문에는 원숭이라 썼지만 그것은 마루타야. 그런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잖아"(每日新聞, 1981년 10월16일).

이케다는 731부대에서 인체실험을 한 것을 원숭이나 토끼 등의 동물을 사용한 것으로 속여 군의 잡지나 학회에 발표했다고 털어놓았다. 원숭이 체온이 원래 사람보다 8도 정도 높기 때문에 공표할 때는 사람을 사용해서 얻은 데이터의 숫자를 바꿔야 했다는 얘기다. '어찌 생체실험을 할 수 있느냐'고 기자가 묻자, 이케다는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이봐, 전쟁 중이었다고. 그리고 전쟁 뒤 분명히 도움이 되고 있지 않나."

당시 이케다는 오사카에서 '이케다 진료소'란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피부·성병·항문 쪽을 전문으로 치료해 오사카에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의사였다.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A 전직군의'란 가명을 쓰긴 했지만, 듣는 이에 따라선 '죽음을 앞둔 노(老)의사의 뒤늦은 고백'쯤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 말년의 이시이 시로. 1959년 후두암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생체실험과 세균전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용서를 빌지 않았다. ⓒ위키미디어

마루타 실험 자료로 박사학위 받아

이케다가 지녔던 지난날 전쟁범죄자로서의 민낯이 일본사회에 보다 분명히 떠오른 시점은 바로 2년 뒤의 일이다. 1983년 가을, 도쿄 시내의 헌책방에서 '광동군방역급수부 연구보고'를 비롯한 731부대 관련 자료가 무더기로 발견돼 큰 화제를 불렀다. 이 자료 가운데 6개 실험기록에 보이는 이름이 이케다 나에오(당시 군의소좌)였다. 그러면서 731부대의 전쟁범죄가 일본인들 사이에 새삼 큰 관심을 끌었다. 이케다를 추적해온 다케우치 지이치, 하라 후미오의 글을 보자.

[이케다는 1942년 1월10일 만주국 헤이허성(黑河省) 산선부 헤이허육군병원으로 가 인체실험을 했다. 1월14일 유행성출혈열로 진단받은 병사로부터 채취한 혈액을 중국인 2명에게 주사하여 감염시켰다. 며칠 뒤 출혈열 환자의 피를 빨아먹은 이를 사용해 다른 쿨리 4명도 감염시켰다. 벼룩을 사용해 같은 실험을 진행했다. 이케다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시이 731부대장에게 벼룩으로도 감염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보고했더니 기뻐했다. 페스트 벼룩처럼 세균무기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15년전쟁과 일본의학의료연구회, 293-294쪽).

패전 뒤 일본으로 돌아온 이케다는 만주에서의 생체실험으로 얻어낸 자료를 이용해 여러 논문을 써냈다. '만주 유행성출혈열의 임상학적 연구'(<니카타 의학잡지> 74권, 1960년, 학위취득논문)과 '유행성 출혈열의 유행학적 조사연구'(41권 9호, 1967년12월)와 '유행성출혈열의 이와 벼룩을 이용한 감염시험'(43권 5호, 1968년 8월) 등이다.

이케다가 도덕적으로 비난 받는 더 큰 문제는 731부대에서 생체실험 자료를 바탕으로 의학박사 논문을 냈다는 점이다. 그는 1959년 니카타의대에서 '만주 유행성 출혈열의 임상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는 '지도: 전직 관동군방역급수부장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라 쓰여 있다. 기타노 마사지라면 이시이 시로에 이은 제2대 731부대장이다. 이 논문에서 이케다는 생체실험을 했다고 분명히 밝히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앞서 마이니치신문 기자에게 했던 말에서 생체실험 사실이 드러난다.

731부대 출신 21명의 의학박사

세균무기 개발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연구 재료로 삼는 생체실험은 누가 뭐래도 전쟁범죄 행위다. 생체실험을 거듭하며 얻어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의학박사 논문은 '악마의 기록'이지 학문적 성과라 우길 수는 없다. 더구나 그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려 한다는 것은 최소의 염치마저 내다버린 뻔뻔한 짓이다.

글 앞부분에서 살펴봤듯이, 마쓰무라 다카오(松村高夫, 게이오대 명예교수, 경제사)는 731부대 간부들이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범죄에 커다란 몫을 차지한 책임을 져야 하는데도) 패전 뒤 일본의 요직을 차지했고 일본 의학계는 이를 묵인했다는 점에 비판적이다. 나아가 그는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했던 연구자들이 그 연구를 바탕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딴 것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다.

마쓰무라 교수에 따르면, 패전 뒤 일본 의학계에서 위의 이케다 나에오처럼 731부대 출신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딴 '악마의 의사'들이 확인된 사례만 21명이다. 논문 하나하나마다 논란이 따르고 명예훼손 등 법적인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마쓰무라는 굳이 실명을 밝히진 않았다. 하지만 일본 의학계에서 조금만 관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알만한 이름들이다(松村高夫, '731部隊による細菌戦と戦時·戦後医学', 三田學會雜誌, 106권 1호, 2013년 4월. <표 2> 참조).

▲ <표 2>. 731부대 출신 21명 연구자들의 학위논문 주제들.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얻은 '피 묻은' 데이터를 논문에 활용했을 것이란 비판을 받는다. ⓒ松村高夫

마쓰무라는 특히 이시이 시로의 부관이었던 가네코 준이치(金子順一)와 다카하시 마사히코(高橋正彦)가 각각 게이오대학, 도쿄대학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겠다고 내놓은 논문에 비판적이다. 731부대가 저질렀던 세균전쟁의 범죄행위를 바탕으로 한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네코와 다카하시는 731부대의 내부 비자료를 그들의 논문에 그대로 옮겼다. 731부대가 중국 만주 눙안(農安)과 신징(新京) 지역에서 실제로 저질렀던 세균실험의 성과뿐 아니다. 그 뒤에도 이어졌던 731부대의 체계적 세균실험 작전 결과를 논문 속에 담았다.

1940년 농안과 신징 지역에서 느닷 없이 페스트가 번져 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다. 이시이 시로도 1943년 11월 1일 육군성 의무국 회의에서 "지금까지 눙안 현에서 다나카(田中) 기사 등 6명이 비밀리에 (살포)했던 것이 가장 (인명 살상에) 효과적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연재 55 참조).

가네코와 다카하시는 731부대에서 에어졸(세균 분무) 분야의 공동 책임자로 중국 농촌 지역에서 세균전 실험을 했고 실제로 피해를 안겼다. 그렇다면 전쟁범죄자들이다. 이들이 전쟁범죄를 통해 얻어낸 데이터를 학위논문에 쓰려는 것 자체가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이 면책 했다고 죄가 사라질까

이런 비윤리적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일본의학계가 문제다. 마쓰무라는 '전후 일본의 대학 의학부가 731부대 관계자에게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상징'되듯이, 일본 의학계가 지난날의 전쟁범죄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자세와는 거리가 먼 것을 안타까워한다(독일에선 나치 의사들의 박사학위가 취소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죽음의 천사' 요제프멩겔레의 경우가 그러하다. 멩겔레에 대해선 연재 52 참조).

일본 의사들의 모임인 일본의사회는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건민건병(健民健兵)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웠었다. 많은 젊은 의사들이 히로히토에 충성을 바치며 대동아공영권을 다지기 위한 성전(聖戰) 승리를 위해 군의관으로 침략전쟁의 일선에 나아갔다. 또는 731부대를 비롯, '이시이 기관'에 속한 부대로 들어가 '방역급수'로 위장한 채 생체실험을 거듭하며 세균전을 준비했었다.

일본의사회는 전쟁범죄에 관여한 의사와 연구자들을 내쳤을까. 아니다. 아무런 논란 없이 다들 정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지난날 일본 의사들이 벌인 전쟁범죄에 대해 집단적으로 사과의 뜻을 나타냈을까. 아니다. 침묵으로 지내왔다. 731부대 관련자들의 박사학위는 철회되었을까. 아니다. 그런 분위기 아래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전범자들은 죽을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사죄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묻게 된다. 미국이 세균전 자료를 챙기고 전쟁범죄를 덮어 주었다고 그들의 죄가 사라졌는가?

글이 길어졌다. 다음 주 글에선 △731부대의 세균전에 피해를 입은 중국인 희생자와 유족들이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한 재판이 제대로 마무리 됐는지, △일왕 히로히토에겐 731부대와 관련한 전쟁범죄 책임이 없는지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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