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안 하고 몰수한 친일파 땅 600억…정작 유공자에겐 ‘그림의 떡’[공성윤의 경공술]
20년간 국고 귀속 이뤄졌지만 매각 지지부진…’유공자 지원’이란 매각 목적 충분히 이행 안 돼
(시사저널=공성윤 기자)
[편집자주] 무협지를 탐독하신 분들은 '경공술(輕功術)'에 익숙하실 겁니다. 몸을 가볍게 해서 땅이나 물 위를 날아다니는 기술이죠. 그 경지에 오르면 시공간을 초월해 이동할 수 있습니다. 경매와 공매를 공부하는 분들도 이처럼 누구보다 더 빨리,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현실에도 경공술이 있습니다. '경매와 공매의 기술'입니다. 무협지는 그 터득 방법을 알려주지 않지만, 꼼꼼한 현장 취재로 경공술을 발굴해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841만 관객을 기록(3월14일 기준)하며 올해 첫 번째 '천만 영화'를 넘보는 《파묘》를 두고 때아닌 이념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영화의 내용이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으려고 한반도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가설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낭설로 결론 났지만, 민족정기 복원을 위해 사법부가 합법화한 행위가 있다. 영화에서도 넌지시 내비치는 친일파 재산 몰수다.
헌법재판소는 친일파 재산의 국고 환수를 위해 2005년 제정된 '친일재산귀속법'을 합헌으로 결정했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헌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란 이유에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소송 등을 통해 친일파 후손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있다. 이는 친일재산귀속법에 따라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의 공매 절차를 거쳐 독립유공자와 유가족의 지원금으로 쓰인다. 그런데 친일귀속재산이 지난 3년간 꾸준히 매각됐음에도 여전히 팔리지 않은 재산이 600여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재산을 압류하고도 법률상 목적을 충분히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친일귀속재산 전국 857필지…경기도에 최다
시사저널이 캠코의 공매포털 온비드를 통해 현재 매각 대기 중인 친일귀속재산을 집계해 보니 전국 총 860필지로 확인됐다. 용도는 전부 토지다. 친일귀속재산을 관리하는 국가보훈부 관계자는 "지난해와 올해 초 경기도 용인시·남양주시, 충남 논산시 등의 3필지가 팔려 정확히 857필지가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857필지를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경기도가 246필지로 가장 많았다. 충북(200필지)과 충남(182필지)이 뒤를 이었고, 서울에도 15필지가 있었다. 면적을 모두 더하면 약 631만㎡다. 여의도 면적(290만㎡)의 두 배가 넘는다. 2010년 해산된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찾아낸 친일행위자 토지 774만㎡에 비하면 다소 줄어들었다. 국가보훈부 관계자는 "활용도가 높고 투자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토지는 일찍 매각됐다"고 밝혔다.
현재 남아있는 토지 중 단일 필지 기준으로 제일 넓은 곳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임야다. 계룡산 국립공원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고 면적은 123만㎡다. 친일귀속재산 전체 면적의 약 19%를 차지한다. 원래 소유주는 일제강점기 조선 귀족이자 친일파인 민영욱이었다. 정부는 민영욱의 국내외 후손이 물려받은 이 땅을 국고로 환수 조치했다. 다만 해당 토지는 문화재나 국립공원 등 미래세대를 위해 정부가 영구히 보존해야 할 '유산자산'으로 분류돼 공매 대상은 아니다.
두 번째로 넓은 토지는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의 청계산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면적은 77만㎡다. 서쪽으로 약 100m 거리에 청계사가 있다. 서울에 있는 친일귀속재산 중 가장 넓은 토지는 강북구 우이동의 임야다. 북한산 동쪽 등지에 있고 면적은 3200㎡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의 묘소에 인접해 있다.
친일귀속재산 857필지의 공시지가 총액은 401억원이다. 올해 토지 공시지가율(실거래가 대비 공시지가 비율) 평균치인 65.5%를 적용하면, 총 시세는 대략 612억원으로 추정된다. 해당 재산은 캠코가 주기적으로 공매에 부치고 있다. 일부 재산은 매수 요청이 있을 경우 수시로 경쟁입찰을 통해 매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년째 답보 상태인 땅도 부지기수다. 2022년 이광재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친일귀속재산 매각이 친일재산귀속법 제정 후 17년간 27%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2022년 3월 국가보훈부와 캠코는 대대적으로 친일귀속재산 공매에 나섰다. 당시 입지조건 등을 고려해 활용도가 높은 토지 140필지를 뽑아 목록을 공개하고 매수를 독려했다. 목록을 보니 서울·경기도 등 수도권과 충청 소재 토지가 각각 78필지, 40필지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또 토지이용계획상 투자 가치가 높은 계획관리지역 땅이 40필지였고, 이미 가치가 입증된 도시지역 땅도 10필지(중복 제외)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사실상 '참패'였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 140필지 중 경기도 김포시와 전북 고창군의 땅 두 필지밖에 팔리지 않은 것이다.
매각 대금 153억, '유공자 지원기금' 13% 불과
캠코 관계자는 "친일귀속재산에 관해 간간이 매수 문의가 오긴 하지만 잘 팔리진 않는 편"이라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최저입찰가를 결정하는) 감정가가 공시지가와 크게 차이가 나다 보니 이득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매수 희망자는 공매가 결정되기 전까지 감정가를 알 수 없어 입찰가를 추산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또 친일귀속재산 대부분이 산지이다 보니 투자 가치가 낮은 것으로 풀이된다. 장기화되는 고금리 기조와 부동산 침체로 경매·공매 시장에 찬바람이 부는 점도 간과하기 힘들다.
친일귀속재산의 매각 대금은 독립유공자와 유가족을 돕는 '순국선열·애국지사 사업기금'(순애기금)의 재원으로 활용된다. 국가보훈부가 공시한 순애기금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기금 자체 수입 중 친일귀속재산 매각 대금은 △2020년 15억원 △2021년 56억원 △2022년 153억원으로 매년 늘었다. 그 밖에 친일귀속재산 토지 대여료, 광복회관 임대수익, 이자수익 등도 자체 수입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모두 합해도 순애기금 전체 수입액의 13%(2022년)에 그친다. 대신 '독립유공자 손자녀 생활지원금' 명목으로 따로 배정된 국가보훈부 예산이 60%를 차지하고 있다. 기금의 과반을 외부 재원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유공자 지원을 비롯해 유공자 묘소 관리, 독립운동 관련 문헌 발간 등 기금의 사업비 지출이 외부 재원 수입을 웃도는 수준이다.
이와 관련해 친일귀속재산 활용도를 높일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대부분이 산지인 토지의 용도변경이 그중 하나다. 또는 대부계약을 적극 허용해 임대료 수입을 높이는 방법도 거론된다. 2022년 친일귀속재산 토지의 임대료는 2억8300만원으로 집계됐다. 토지 전체 자본 가치가 612억원으로 추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수익률이 0.4%에 불과하다. 친일귀속재산의 인지도가 낮은 점도 변수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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