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미소년'으로 영국 발칵...두 남자 관계 어땠길래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토마스 게인즈버러(1727~1788)
철저한 준비와 관리로 '아름다움' 만든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
영국 미술을 만든 두 천재 라이벌
“이건…. 집 주인이야 별 뜻 없이 걸었겠지만, 회장님을 완전히 엿 먹이는 건데….”
1770년 영국 런던에 있는 한 부자의 저택.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벽에 걸린 아름다운 작품, ‘블루 보이’에 감탄하면서도 이런 걱정을 했습니다. 이 그림은 그 존재 자체로 ‘회장님’에게 큰 모욕을 주는 작품이었거든요. 회장님의 이름은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 영국 최고의 화가들이 모인 왕립아카데미의 수장이자 회원들에게 예술 이론을 가르치는 ‘화가들의 화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오늘 저녁 자리에 참석할 예정이었지요.
그런데 그 대단한 회장님이 어째서 고작 소년의 초상화 하나에 모욕을 당한다는 걸까. 이유는 이랬습니다. 먼저 이 그림의 작가는 레이놀즈의 평생의 라이벌, 토마스 게인즈버러(1727~1788). 둘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런던 시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지요. 더 큰 문제는, 이 그림이 레이놀즈의 예술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작품이었단 겁니다. 레이놀즈는 항상 입버릇처럼 “초록색과 파란색을 너무 많이 쓰면 그림이 이상해진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게인즈버러는 이 말에 반박하기 위해 파란색과 초록색을 있는 대로 다 써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다시피, 예술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회장님 얘기가 틀렸다는 건가?” “글쎄, 정말 잘 그리긴 했어.” 한동안 술렁이던 사람들은 갑자기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흠칫 놀라 조용해졌습니다. 어느새 들어온 레이놀즈가 조용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다.
한참 물끄러미 그림을 보던 레이놀즈.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괜찮은 그림이군. 늦어서 미안합니다. 자리 시작합시다.” 그의 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편안해 보였습니다. 손님들은 생각했습니다. ‘역시 거장은 거장이야. 전혀 흔들림이 없네.’ 하지만 누군가 테이블 아래를 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은 달라졌을 겁니다. 무릎 위에 놓인 레이놀즈의 손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니까요. 너무 다르면서도 너무나 비슷했던, 두 천재의 이야기.
이보다 더 다를 순 없다
아무리 사이 나쁜 라이벌이라고 해도, 게인즈버러와 레이놀즈만큼 모든 게 정 반대인 경우는 드물 겁니다. 먼저 게인즈버러. 게인즈버러의 아버지는 경제적인 능력이 시원찮았지만 재미있고 소탈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안 분위기도 자유로웠습니다. 덕분에 게인즈버러는 구김살 없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랐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별다른 가르침은 없었지만 그 덕분에 게인즈버러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천재성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던 그는 10살 정도에 이미 어른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고 합니다.
게인즈버러가 어떤 성격을 타고났는지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어린 게인즈버러는, 선생님의 필체를 흉내 내 “아이가 수업을 하루 쉬고 그림을 그리게 해 주세요”라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깜빡 속아 넘어갔지요. 미술 천재답게 필체도 기막히게 위조했으니까요.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거짓말을 알아챈 아버지는, 게인즈버러를 몹시 혼냈습니다. “이런 식이면 너는 범죄자가 될 거다!” 하지만 게인즈버러의 그림들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고 합니다. “너는 그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재능도 있어. 한번 열심히 해봐라.”
13살의 나이로 런던에 미술 유학을 떠난 게인즈버러는 당대 유명 화가들 밑에서 일하며 실력을 키워갔습니다. 스무살 무렵 그는 이미 영국 전역에서 잘 알려진 화가가 돼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는 돈을 잘 벌었습니다. 얼굴은 잘생겼고, 옷을 잘 입었고, 성격은 솔직하고 소탈한 데다 유머 감각도 뛰어났고, 먹고 마시고 노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인기가 많았습니다.
삶처럼 그의 작품에도 자유로운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신들린 듯 붓을 놀렸습니다. 그림을 너무 빨리 완성해서, 대충 그렸다는 말을 들을까 봐 한참 마무리하는 척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반면 그림 완성이 터무니없이 늦을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충동적인 기질도 강해서 마음에 안 드는 고객은 거부했습니다. “그림이 별로”라는 고객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그럼 당신은 이걸 가질 필요가 없겠군!”이라며 캔버스를 찢어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정반대였습니다. 먼저 작품 스타일. 목사 겸 학교장의 아들로 태어난 레이놀즈는 엄격한 분위기의 집안에서 모범생으로 자랐습니다. 런던 유학만 마치고 화가로 데뷔한 ‘국내파’ 게인즈버러와 달리, 그는 당시 유럽 정통파 화가들이 다녀오는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였습니다. 덕분에 철저한 실전파인 게인즈버러와 달리 그는 미술 이론에도 조예가 아주 깊었습니다.
레이놀즈는 항상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은 그리스·로마 시대에 나왔으니, 우리는 그 아름다움과 조화를 본받아야 한다는 ‘신고전주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게인즈버러는 정반대였습니다. ‘가방끈 좀 길고 유학 좀 다녀왔다고 유세 떨기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게인즈버러는 그리스 조각을 “창백한 얼굴, 코만 쓸데없이 긴 의미 없는 유령 같은 얼굴”이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외모와 성격도 정반대였습니다. 재미있고 유쾌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남 게인즈버러와 달리, 레이놀즈는 외모가 수수했고 대단한 유머 감각도 없었습니다. 로마 유학 시절 걸린 병으로 귀 한쪽이 잘 들리지 않았고, 어린 시절 사고로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적이 없었습니다. 성실했고 예의 바르고 겸손해서 모든 사람과 잘 지냈습니다. 성격도 꼼꼼해서 고객의 모든 요구사항과 신상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미술사학자들은 “레이놀즈의 작품과 서비스에 만족한 귀족들이 입소문을 내준 덕분에 그는 일찌감치 성공할 수 있었다”(웬도르프)고 평가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냐고요? 전혀 없어요.” 레이놀즈는 항상 이렇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몇몇은 그 말을 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레이놀즈에게는 은근히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거든요. 높은 사람이 그를 모욕하거나, 혹은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비판할 때마다 레이놀즈는 못 들은 척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지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유학 시절에 귓병을 앓아서 말씀을 잘 못 들었습니다.” 누군가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를 비교할 때도, 레이놀즈는 “귀가 안 좋다”며 자리를 피하곤 했습니다.
하늘이 초록색이라니?
“레이놀즈가 잘 그리냐, 게인즈버러가 잘 그리냐.” 두 화가를 이렇게 비교하는 건 1700년대 중후반 영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화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둘은 영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가였습니다. 고객층도 겹쳤습니다. 다만 스타일은 정반대였습니다. 레이놀즈는 모델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그렸습니다. 반면 게인즈버러는 모델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렸습니다. 결혼사진에 비유하자면 레이놀즈는 스튜디오에서 찍은 웨딩사진, 게인즈버러는 신혼여행지에서 찍은 스냅사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작품으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평가가 중론. 다만 커리어만 놓고 봤을 때는 레이놀즈가 앞섰습니다. 대표적인 타이틀이 왕립아카데미 회장이었습니다. 영국은 1768년 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문화 강국’이자 라이벌 국가인 프랑스를 예술로 따라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료 화가들을 모으는 등 특유의 리더십과 정치력을 통해 설립에 큰 역할을 한 레이놀즈가 아카데미의 첫 번째 회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반면 게인즈버러는 아카데미에 일반 회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는, 아카데미가 매년 여는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격돌하기 시작합니다. 전시가 열릴 때마다 런던 시민들과 신문은 둘의 작품을 비교하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해마다 게인즈버러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는 “레이놀즈가 일부러 내 작품을 안 좋은 자리에만 걸어 놓는다”고 불평하곤 했습니다. 아카데미 측이 “어떤 작품을 어디에 거는지는 레이놀즈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고 해명했지만, 게인즈버러는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하늘 색깔도 제대로 못 칠하는 게 무슨 화가야?” 화가 잔뜩 난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다녔습니다. 이들이 살았던 18세기는 아직 물감과 그림 재료에 대한 연구가 많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학구적이었던 레이놀즈는 아카데미 회장으로서 물감과 재료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옛날 그림들을 한 겹씩 벗겨내며 무슨 물감을 썼는지 연구했고, 새로운 재료도 적극적으로 썼습니다. 그 탓에 레이놀즈의 작품에서는 꽤 자주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초상화 속 하늘이 그림을 받은 지 몇 달 만에 파란색으로 녹색으로 바뀐 게 대표적이었습니다.
황당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림 한 점이 고객에게 배송되던 중 어딘가에 부딪혔는데, 그림 전체가 캔버스에서 미끄러져 길바닥에 떨어진 겁니다. 물감이 캔버스에 전혀 달라붙지 못해서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고객이 “그림 색이 변해버렸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레이놀즈를 이렇게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레이놀즈 그림은 색이 날아다닌다면서?” 그렇게 비웃는 사람들의 맨 앞에는, 게인즈버러가 있었습니다.
같은 배우를 그리다
그러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레이놀즈가 게인즈버러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겁니다. 1782년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레이놀즈는 게인즈버러의 ‘돼지와 함께 있는 소녀’를 구입했습니다. “이건 최고의 그림입니다.” 레이놀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라이벌의 실력은 인정하고 있던 게인즈버러는 기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답으로 꼭 회장님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이 ‘훈훈한 광경’에 영국 사람들은 손뼉을 쳤습니다.
하지만 그 초상화는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둘의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레이놀즈가 게인즈버러의 신경을 긁었을 수도 있고, 게인즈버러가 레이놀즈에게 버럭 화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레이놀즈가 게인즈버러의 그림을 사준 건 자신의 관대함을 강조하면서도 게인즈버러의 윗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메킨타이어)고 해석하는 미술사학자도 있습니다.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가 너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생각 때문이었겠지요.
다시 갈라진 둘의 사이. 1784년 마침내 파열음을 내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넙니다. 발단은 4월 아카데미 전시회. 자기 대표작을 좋은 자리에 걸어달라는 요청을 아카데미가 승인하지 않자, 마침내 게인즈버러는 “이딴 전시회에 다시는 참여하지 않겠다”며 작품을 돌려받은 뒤 아카데미를 탈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8월. 당시 왕(조지 3세)은 새로운 궁정 수석 화가를 선임하려고 했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던 건 평소 왕의 총애를 받던 게인즈버러. 하지만 레이놀즈가 여기에 끼어들었습니다. “궁정 수석 화가가 될 자격이 있는 건 접니다. 궁정 수석 화가를 시켜주지 않으시면 왕립 아카데미 회장직을 사임하겠습니다.” 레이놀즈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그가 자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왕은 레이놀즈의 청을 받아줬습니다.
이로써 둘의 관계는 박살이 났고,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사라 시돈스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같은 사람을 게인즈버러는 1785년, 레이놀즈는 1789년 각각 그렸습니다.
이 두 작품에는 두 사람의 스타일 차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레이놀즈는 시돈스를 연극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뮤즈의 이미지로 그렸습니다. 이런 식의 그리스·로마풍 그림을 그리기 위해 레이놀즈는 모델에게 종종 로마식 옷을 입히곤 했습니다. 반면 게인즈버러는 한 인간으로서의 시돈스를 그렸습니다. 극적인 조명이나 재미있는 요소는 조금 부족했지만, 무대 뒤 실제 모델에 초점을 맞춘 그림이었습니다. 게인즈버러는 모델이 평소 입는 옷이 개성을 포착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반복했습니다. 궁정 수석 화가는 비록 레이놀즈였지만, 왕은 게인즈버러를 더 선호했습니다. 왕이 게인즈버러의 소탈하고 솔직한 태도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은 궁정 수석 화가에게 주는 수당까지 10분의 1로 삭감했습니다. 레이놀즈는 좌절감을 드러냈습니다. “궁정 수석 화가가 이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다. 차라리 궁중에서 쥐를 잡는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때로 삶의 마지막은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게인즈버러에게도 그랬습니다. 60세가 거의 다 된 그의 목에서 종양이 발견된 겁니다. 이 무렵 게인즈버러가 그린 풍경화에서 ‘마지막’이라는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는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 바쁘고 시끄러운 일과를 마친 후, 조용히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순간. ‘이제 작별이구나.’ 게인즈버러는 그림을 그리며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건강이 나빠지면서 평생 그의 마음속을 휘젓던 격렬한 미움의 감정도 가라앉고, 그 자리에 후회가 떠올랐습니다. 누구보다 많이 앞장서서 레이놀즈를 욕하고 비난하던 게인즈버러는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 레이놀즈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게인즈버러는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게인즈버러와 레이놀즈는 서로 잘 지내기 어려운 사이였습니다. 성격과 기질이 정반대로 다르면서도 활동하는 시기와 영역, 실력은 거의 똑같았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과정에서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를 비열한 위선자라고 생각했고, 레이놀즈는 게인즈버러를 못 배운 망나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최고’를 위해 경쟁하는 사람들 사이의 묘한 유대감이 존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구나…. 편지지와 펜을 가져와 주렴.” 죽음을 앞둔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한 번만 오셔서 제 그림을 봐주세요.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항상 당신을 존경해 왔습니다.”
편지를 받은 레이놀즈는 게인즈버러의 집으로 찾아와 침대 곁에 앉았습니다. 둘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아서, 그저 상상해볼 따름입니다. “나는 당신의 세련된 양식이 부러웠어요. 로마에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나도 자네의 자유롭고 유려한 붓질을 질투하곤 했어. 유학을 갔다 왔다면 더 좋았겠지.” “하하. 당신은 역시 재수 없는 인간이야.” 그리고 둘은 조용히 웃지 않았을까요. 평생에 걸쳐 서로 경쟁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지만, 두 사람은 예술이라는 같은 길을 걷는 동료였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며칠 뒤 게인즈버러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레이놀즈는 아카데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와 그는 친구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를 잃은 것을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레이놀즈도 뒤따라가듯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게인즈버러와 레이놀즈는 18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영국 예술가들로 취급받습니다. 두 거장은 당시 프랑스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있던 영국의 문화 수준을 확 끌어올렸습니다. 영국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 강국이 된 토대에는 이들의 경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역사적 의미보다도 더 중요한 건, 두 거장이 ‘우리에게 예술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또 다른 인상적인 정의를 알려준다는 겁니다. 게인즈버러와 레이놀즈의 경쟁과 화해처럼 예술이란 서로 다른 인간이 부딪히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성장해서, 결국에는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인간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지난 7일 출간된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이 출간 첫 주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향후 북토크 등 관련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기자페이지 업데이트 및 인스타그램 계정을 참고해 주세요.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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