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펭귄들, 태연히 남극의 여름을 즐기고
펭귄이 사는 법
자이언트페트럴이 차지한 바위들을 지나 해안가에 도착하니 펭귄들의 세상이 펼쳐졌다. 젠투펭귄들이 서서 남극의 여름을 누리고 있었다. 회색빛 자갈은 펭귄들의 희고 검은 몸체와 잘 어울렸고 누군가 처음부터 의도한 듯 모든 풍경이 조화를 이뤘다. 비록 버디와 나는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원색의 방한복을 걸치고 있었지만. 만약 펭귄들이 인간들의 외양을 묘사한다면 상체는 빨간 가죽이며 손은 검정·파랑·갈색 등으로 두툼하고 눈은 흰자 없이 검정으로만 이루어져 귓바퀴까지 이어진 얇은 뼈대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선글라스나 고글 없이는 섬을 돌아다니지 않으니까.
“일년에 한번 털갈이를 하는데 이제 시작이에요.”
버디가 가리켰다. 해안가 펭귄들은 대체로 성체들이었다. 지난해 11월 중순쯤 태어나 한달 뒤 세상으로 나온 새끼 펭귄들은 펭귄 마을 능선과 경사지 그리고 절벽에 아직 머무르고 있었다. 잘못 세탁한 울스웨터처럼 한올 한올 엉켜 있는 흰배, 복슬복슬한 등. 그들은 여름이, 남극이라는 세상이, 얼음의 주기에 따르는 삶이 처음이 아닌 존재들이었다. 위험과 공포와 배고픔, 바위에 긁히는 상처와 표범물범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수중 속 피로를 겪은 존재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추위를 녹이는 햇살, 지하에서부터 조금씩 풀려나오는 물줄기, 부리 끝에 와닿는 순한 바람, 심해에서의 겨울잠을 끝내고 수면으로 떠오른 크릴들 같은 여름의 선물도 기쁘게 누려본 존재였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살아남은 펭귄들이었다.
완충재 같은 말 “그냥 그런 애”
지구를 한참 돌아 펭귄들 앞에 서 있는 나도 이 순간을 손쉽게 얻은 건 아니었다. 살아남기를 잘했다고 나는 해변에서 생각했다. 그건 반대의 순간들 또한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위기들이었을 것이다.
펭귄과 나 그리고 흰풀마갈매기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쳤고 나는 그런 우리의 거리가 평화롭게 느껴졌다. 몇몇 펭귄들은 미동도 않고 바람을 등지고 있었다. 마치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펭귄을 좋아하는 건 용감해서가 아닐까 싶었다. 으르렁거리며 완력을 과시하는 용감함이 아니라 느리고 작은 존재가 신비롭게 보여주는 태연함. 극한의 날씨를 버티며 유빙의 바다를 수영하는 펭귄들의 모습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동과 경이.
“남극에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나는 얼얼한 입을 간신히 움직여 버디에게 물었다.
“어려서부터 선원이 되어 세계 여행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 꿈을 남극 진출로 이룬 거죠. 작가님은 어려서 어떤 애였어요?”
“저요?”
나는 날개를 앞뒤로 퍼덕이며 부르르 몸을 떨곤 하는 펭귄들을 바라보았다. 읽은 책에 따르면 대부분의 동물들이 각자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눈앞에 서 있는 펭귄들도 누구는 호기심을 못 견디고 누구는 마음이 강퍅해 자주 부리로 옆 펭귄을 쪼고 누구는 주춤주춤하다 짝짓기를 못 하고 호젓하게 여름을 날 것이다.
“그냥 그런 애 있죠. 글짓기 좋아하고 책 좋아하고 그냥 그런 애였어요.”
그냥 그런 애, 그러고 보니 유년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말이었다. 정확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누구나 거치는 유년으로 만들고 싶을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의 완충재로 끼워넣는 표현에 가까웠다.
버디는 이제 비탈로 올라가자고 했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자갈 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보니 버디는 아무리 높은 산도 단숨에 올라가는 신의 발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경사가 얼마든, 무엇이 가로막든 직진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날 내 느린 걸음과 미적거리는 시간을 기다려준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버디는 그러면서도 남들이 얼마큼 오나 늘 살피고 있었고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면 괜찮을 거라고 같이 가보자고 의지를 불어넣었다. 물론 나는 며칠 뒤에 버디의 말을 따랐다가 얼음 언덕에서 자빠지고 말았지만.
펭귄 똥의 속도
마을 중턱으로 올라가자 너무 많은 펭귄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백마리는 되어 보였고 모두들 가만있지를 않았다. 눈비탈을 가로지르며 펭귄 한마리가 아슬아슬하게 뛰었고 다른 펭귄이 죽자고 뒤쫓았다. 가만 보니 이제 막 바다에서 신선한 크릴을 한껏 채워 온 부모 펭귄과 새끼인 듯했다. 부모들은 그렇게 한바탕 경주를 하고 나서 가장 끈질기게 따라온 새끼에게 먹이를 준다고 한다. 아마 나 같은 내향형 인간이 펭귄으로 태어났다면 비펭귄 동물인 지금보다 훨씬 배고프게 지냈을 것 같다. 꼬리깃으로도 어른 펭귄과 새끼 펭귄은 구분할 수 있었다. 붓꼬리 펭귄속인 젠투펭귄은 힘주어 써내려간 붓 모양 같은 꼬리깃을 가지지만 새끼들은 아직 꼬리가 발달하지 못해 뭉툭했다.
언덕을 다 올라가자 크레슈(crèche, 탁아소를 뜻하는 프랑스말로 새끼 펭귄들의 군집을 가리키는 말)가 보였다. 일종의 펭귄 유치원으로 부모 펭귄들이 식사를 위해 바다로 나간 사이 새끼 펭귄들이 무리 지어 모여 있는 것이다. 유치원 선생님에 해당하는 몇몇 어른 펭귄들이 지키면서 이제 막 세상으로 나와 호기심 많고 활력 넘치는 새끼들을 보살폈다. 와글와글 떠드는 펭귄들 사이를 지날 때마다 어떤 형태로든 반응이 일었다. 마지못해 몇 걸음 피해주기도 하고 놀라 줄행랑을 치기도 하고 가슴을 좍 펴고 다가오거나 꼬리를 살짝 들고는 유성 페인트처럼 하얀 똥을 갈기기도 했다. 그건 누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갈기는 것에 가까웠는데, 꽤 빠른 속도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원영 박사의 ‘물속을 나는 새’(사이언스북스)에 따르면 독일의 한 과학자는 연구를 통해 펭귄 똥이 대략 60㎪(킬로파스칼)의 압력으로 40㎝나 날아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그건 인간이 화장실에서 처리하는 속도의 8배에 달한다는 생생한 비교와 함께 관찰과 수식으로 알아낸 결과다. 궁금한 건 해결해내고 마는 과학자들의 투지가 엿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곳곳에 그런 속도로 처리된 펭귄 분변이 선명했다. 명작을 완성하려는 어느 예술가가 페인트를 마구 뿌려댄 것처럼 흰색과 분홍색이 잿빛 자갈 위로 사방에 튀어 있었다. 크릴이 소화가 덜 될 경우 펭귄 똥은 분홍빛을 띤다.
가까이에서 보니 어른 펭귄들은 아주 멋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한 유선형이었고 가슴은 탄탄했으며 대부분 짤막하다고 기억하고 있을 다리조차 제법 길고 근육이 잡혀 있었다. 반면에 새끼 펭귄들은 조그마한 머리가 북슬북슬한 털 속에 파묻혀 작은 눈사람 같았다. 방수깃이 나지 않아 아직 보드라운 솜깃털이었다.
비탈을 다 오르자 평지가 나왔고 드디어 턱끈펭귄들이 나타났다. 펭귄마을에는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이 이웃으로 살고 있다. 젠투펭귄은 평지와 비탈 쪽에 살고 턱끈펭귄은 절벽과 해안가 노두(露頭, 지층이 지표에 드러난 부분)에서 지낸다. 거친 바위들이 많아서 마음에 걸렸는데, 나중에 기지에 돌아와서 들으니 턱끈펭귄들이 더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바다와 가까우니까 외출에 유리한 것이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기상 나빠 복귀하라는 지시에…
턱끈펭귄들은 실제로 보니 생김새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사진으로 볼 때는 턱 밑을 지나는 선이 이상하게 보였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턱끈펭귄은 사납고 잘 물어뜯는다고 들었는데 일단 젠투펭귄보다 내게 무관심한 건 분명했다. 여기로 오기 전에 들었던 주의 사항들, 펭귄 날개에 맞으면 이가 나갈 수도 있다든가, 부리에 물리면 멍투성이가 된다든가 하는 말들이 떠올라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 세계에 잠시 머무는 존재이고 펭귄들은 이곳의 주인이니까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마을을 돌아보니 새끼들 월령에 차이가 나는 듯했다. 어떤 녀석은 어느덧 솜깃털을 벗고 방수깃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부모 펭귄은 녀석을 배 아래 넣고 추위로부터 단단히 지켰다. 젠투펭귄이 턱끈펭귄보다 더 오래 새끼와 머물며 보살핀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눈이 거세지면서 바람이 강해졌다.
“김금희, 김금희, 여기는 통신실.”
기지에서 무전이 왔다. 분명 한국에서 훈련받았는데 막상 써야 할 때가 되자 버튼을 언제 눌러야 하는지, 말할 때인지 들을 때인지 헷갈렸다. 그러느라 통신실에서 하는 말을 놓쳐버렸고, 하는 수 없이 나는 “지금 연구 활동 중입니다” 하고 최대한 진지하게 보고했다. 나중에 들으니 통신실에서 한 말은 기상이 좋지 않으니 당장 돌아오라는 메시지였다. 거기에 대고 연구 활동 중이라고 답했으니 기지의 지시를 당당히 거부한 셈이라고 사람들이 농담했다. 무전기 대화는 모두에게 공유돼 기지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었다.
버디가 이만 돌아가자고 해서 펭귄 배설물과 눈 녹은 물 등으로 초록 진창이 된 마을을 빠져나왔다. 서로 부리를 대고 “꾸르꾸르땍”(내겐 그렇게 들렸다) 하며 수다를 떠는 턱끈펭귄을 지나, 기지에서 설치한 대기 측정 안테나가 마음에 드는지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젠투펭귄들을 지나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걷는 동안 내내 눈이 내렸고 얼어붙은 남극의 공기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렇게 시시때때로 겨울의 형태를 내보이는,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여름 언덕이었다.
“저기 물개가 있어요.”
버디가 등산스틱으로 해안가를 가리켰다. 시선을 돌렸지만 펭귄들만 보여서 “어디요?” 하고 되묻는데 바위가 서서히 일어섰다. 검은 물개였다.
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칼침 경고’ 황상무, 슬그머니 4줄 사과문…민주 “당장 경질해야”
- 총선판 요동친다…‘공천 파동’ 덮어버린 조국혁신당과 ‘도주 대사’
- [속보] 김부겸 “박용진 배제, 양문석·김우영 막말…가장 큰 위기”
- 안철수 “회칼 황상무 조치 불가피…막말 장예찬·친일 조수연 결단해야”
- [단독] ‘노무현 불량품’ 양문석에 이재명 “문제 안 돼” 일축
- 전국 20개 의대 교수들 “전공의 처분 땐 25일부터 사직서 제출”
- 정세균, 민주당에 ‘노무현 불량품’ 막말 양문석 조처 요구
- ‘푸틴의 발레리나’ 내한공연 취소, 한-러 갈등 새 불씨 되나
- “풀 겁니다”…대통령은 어디 가서 또 무얼 풀어놓을까
- 배식 기다리는 주민에 ‘헬기 사격’…가자지구 280명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