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숲속서 길 잃은 남자가 만난 ‘빛나는’ 무언가의 정체는
“포세의 작품 접근 위한 완벽한 입문서”
삶만큼 죽음 탐구하는 문학의 가능성
작가에 대한 글을 쓰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면 더욱 그렇고, 또 그 상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했다”는 더없이 문학적인 이유로 주어졌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를 위한 서두다. 그가 데뷔 40주년인 지난해 발표한 소설 ‘샤이닝’이 국내에 출간됐다. “포세의 작품에 다가가기 위한 완벽한 입문서”(영국 텔레그래프)라는 평가를 받은 70여 쪽 분량의 소설이다.
‘샤이닝’은 깊고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은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단테의 ‘신곡’ 첫 문장처럼 “어두운 숲속에 들어선 후에야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숲길에 처박힌 차에서 내려 자신을 도울 누군가를 찾아 길을 나선다. 눈이 내리고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남자는 더 깊은 숲 한가운데로 향한다. 이윽고 그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빛나는(Shining)’ 무언가와 조우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윤곽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밝고 하얀 형체. 반짝이는 순백색의 형체.”
소설 속 주인공은 숲을 헤매며 삶과 죽음 사이를 표류한다. 이는 “지루함에 압도당”해 차에 타 운전을 했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결괏값이다. “오른쪽 길과 왼쪽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지점에서 우회전을 했고, 다시 오른쪽과 왼쪽을 선택할 수 있는 다음 교차로에 이르렀을 때 좌회전을” 한 그의 행위에서는 의도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샤이닝’의 손화수 번역가는 묻는다. “그가 숲속의 영원한 어둠, 또는 빛 속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본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었을까.”
‘샤이닝’을 비롯한 포세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그가 2012년 가톨릭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젊은 시절 무신론자였던 포세는 글을 쓰며 믿음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자기 글의 근원을 탐구하려 종교에 발을 들인 이후로 “일종의 화해 또는 평화”가 작품에 등장했다고 포세는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인간의 본질을 그리는 그의 작품에서 신, 즉 창조주의 존재는 고요하나 선연하게 스며들어 있다. 포세를 ‘기독교 작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비평가가 있을 정도다.
‘샤이닝’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숲속에서 마주한 어둠 속 빛, 미지의 무언가의 “나는 여기 있습니다, 나는 항상 여기 있고, 여기에는 항상 내가 있습니다”라는 목소리로부터 신성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입문서라는 평가에 걸맞게 포세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자면 진입 장벽은 낮은 편이다. 일인칭과 삼인칭 시점을 오락가락하지도 않고, 문장 끝의 마침표도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침표를 거의 쓰지 않고 쉼표를 통해 길게 이어지던 전작과는 다른 지점이다.
단순히 읽기 쉽다고 해서 “그의 실험적이고 위대한 작품에 다가가기 위한 좋은 출발점”(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포세 특유의 간결하고 시적 리듬감 있는 문장, 침묵으로 가득한 독백, 역설만은 그대로다. “침묵도 언어”라는 신념을 읽어낼 수 있는 ‘샤이닝’의 문장들은 섬세하게 조각돼 복잡하기 그지없는 내면의 궤적을 드러낸다. 이 소설을 그의 소설 가운데 가장 긴 최근작 ‘7부작’과 나란히 놓는 이들도 있다. 노르웨이의 작가 올라 인세트는 ‘샤이닝’을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데 반드시 7부가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노벨문학상으로 포세와 그의 작품의 위대함은 증명이 됐겠지만, 그 이유만으로 그의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다. 왜 하필, 지금 포세일까. 답은 그가 신뢰하는 ‘문학의 힘’에 있다. 포세는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이런 문장으로 끝맺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글이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있었고, 어쩌면 내 생명을 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글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철학이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포세는 여기에 “문학도 죽음을 배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미국 뉴요커·2022)고 덧붙였다. 문학이 삶에 관한 것만큼이나 죽음에 관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우리 모두의 삶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신비를 함께 파헤치기에 포세의 소설만큼 적합한 텍스트는 어디에도 없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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