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여학생이 주인공인가, 관객이 주인공인가[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 기자 2024. 3. 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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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이 중 신문사가 고른 사진 한 장은, 고등과 여학생들의 "댄스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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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 52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우리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로 합니다.

오늘 고른 사진은 1924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길고 가지런하게 땋은 머리가 인상적인 여학생 4명이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더 많은 학생들이 무대에 올랐을 수도 있지만 사진에는 생략된 것 같습니다. 사진 왼쪽에 댕기만 살짝 보입니다. 사진기자가, 굳이 무대 전체를 다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많은 관객들이 이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관객 수가 3천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 관중 3천의 동덕 학예회 /1924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 관중 3천의 동덕 학예회 지난 12일 오후 4시부터 경운동 천도교 교당에서 동덕여학교의 제 16회 설립 기념회를 개최하엿었는데 학부형 자매가 3천명 가량이나 모여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으며 김기환씨의 사회하에 위선교장 조동식씨의 간략한 예사(禮辭)가 있은 후 재미있는 어여쁜 아가씨네들의 재주보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보통과의 “글자 풀이” 어린이들의 “장갑이야기” 학교극 “초로인생”과 고등과 학생들의 “딴쓰”와 주산경기 등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고 8시 경에 대성황리에 마치었더라.

사진설명을 보면, 종로구 경운동의 천도교 건물에서 동덕여학교의 16회 개교 기념회를 맞아 학예 발표회가 열렸습니다. 특별한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어서 였겠죠? 총 4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야말로 큰 축제의 날이었었군요.

▶ 기사는 이날 진행된 모든 프로그램을 다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문지면에 모든 것을 다 실을 수 없기 때문에 핵심적이고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들만 간략히 보도합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4시간 동안 벌어지는 행사를 매 순간 다 기록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진기자들은 행사의 여러 프로그램 중 가장 ‘그림이 되는’ 프로그램에 주목하고 기다립니다. 가령, 주산 경기처럼 참가자의 실력에 감탄하는 현장 분위기가 있더라도 사진으로 표현되지 않는 종목은 사진기자에게는 관심 밖 행사입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그날 프로그램에는
교장 선생님 축사
보통과 여학생들의 “글자풀이”
“장갑이야기”
“학교극”
고등과 여학생들의 “댄스 공연”
“주산 경연”
등이 있었습니다. 이 중 신문사가 고른 사진 한 장은, 고등과 여학생들의 “댄스 공연”이었다. 가장 역동적이고 게다가 여럿이 똑같은 한복 저고리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시선을 끌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 100년이 지난 올해, 한 여대의 입학식에서 비슷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장충체육관을 빌려 진행된 입학식에 요즘 핫한 걸그룹 ‘비비지’가 초대되었습니다. 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총장님 인사말을 듣던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하고 엄숙해 사진기자들로서는 사진 찍을 찍을 게 없는 모습이었지만, 비비지의 무대가 시작되자 학생들이 핸드폰 플래시를 킨 채 환호했습니다. 이 날 입학식을 보도한 신문에는 이 순간의 학생들 모습이 실렸습니다.

▶ 사진이 모든 순간을 담는 건 아닙니다. 행사의 정점,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 기록됩니다. 물론 꼭 한 장의 사진을 써야 하는 게 아니라면 다양한 순간이 기록될 수 있겠지만 말이죠. 지금은 인터넷으로 사진이 소통될 수 있으니 신문처럼 지면 제약이 없습니다. 무대도 첫 곡, 둘째 셋째 곡, 앵콜 곡 장면까지 다 찍어서 보여줄 수 있고, 메인 보컬 사진도 따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실제 이날 입학식 모습을 그 대학 블로그에 가서 보면 비비지 공연, 총장님 대담, 홍보 앰배서더 학생들 모습 등을 다 볼 수는 있습니다.

▶ 한 장 밖에 지면에 실을 수 없는 상황에서 100년 전 사진기자가 선택한 앵글은 무대 위 공연에 나선 여학생들의 뒤에서 관중들을 향해 찍는 사진이었습니다. 지금도 사진기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앵글입니다.

▶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무대 위에 유명인이 있다면 고민이 커집니다. 무대 위의 유명인도 보이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관중들의 모습까지 같이 찍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대통령 유세 장면에서 한국에서 개발된 앵글이 있습니다. 연단 위 사진기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는 후보자의 모습입니다. 후보자 뒤로 유세장을 가득 메운 지지자들의 모습이 병풍처럼 펼쳐집니다.
1980년대 말, 한국의 사진기자들과 정당의 홍보 담당자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연출 사진입니다. 그 때와 같은 대규모 군중 집회는 사라진 요즈음이지만 정치 현장에 가면 가끔 이런 앵글이 연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후보가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4·10 총선에 나설 각 당의 후보자들에 대한 공천이 이번 주 마무리 됩니다. 올 해는 어떤 형식의 사진이 개발될지 살펴봐야겠습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서울 동덕여학교에서 열린 학예회에서 이뤄진 댄스 동아리 공연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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