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구멍 찢어지게 가난할때 먹던 ‘이것’...왕들은 와인에 넣어 먹었다고? [전형민의 와인프릭]
우리의 주식인 쌀은 9~10월 추수합니다. 이후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는 보리를 심는 이모작을 합니다. 문제는 보리가 제대로 영글 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추수한 쌀이 바닥나는 5~6월에는 아직 보리를 수확할 수 없었죠.
근현대 이전까지는 유통망까지 부실한 덕분에 전국 대부분 지역은 봄철 기근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춘궁기(春窮期) 또는 맥령기(麥嶺期)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우리말은 보릿고개 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지독한 기간을 어떻게든 견뎌내기 위해 뭐든 먹어야 했습니다. 구황작물이라는 말은 이때 탄생했습니다. 구황작물로도 보충이 부족해서 나물, 칡뿌리 따위를 캐 먹거나 소나무의 속껍질(송피)을 먹고, 심지어 진흙(백토)을 구워먹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송피나 백토나 인간은 소화할 수 없는 성분들이 대부분이기에 먹을 땐 어떻게 먹더라도 당연히 탈이 나고 나중에 심각한 변비를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X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은 심한 변비 때문에 실제로 항문이 찢어지던 것에서 유래된 말인 셈입니다.
‘무엇이라도 먹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던 시기에서 ‘무엇을 먹을지’를 고민하는 시기로 변한 요즘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얘기지만, 불과 60여년 전까지도 실존했던 이야기 입니다.
다소 불쾌할 수 있는 보릿고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오늘 소개할 와인이 우리 조상들이 보릿고개 당시 어떻게든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먹었던 송피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전통 와인, 레치나(Retsina) 입니다.
만일 그가 성지(예루살렘)에 도착했다면 그는 성지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 기독교 군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릭은 지중해 동부의 작은 섬, 키프로스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그의 죽음은 처음에 독살로 알려집니다. 건강하던 왕이 아무런 내상도 없이 갑자기 고통에 몸부림치다 절명해버렸으니, 황망한 주위 사람들은 독살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한참 뒤에야 에릭 왕의 죽음이 그의 과음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집니다. 그는 성지로 가는 과정 중 거쳐 지나간 그리스에서 레치나라는 와인에 푹 빠져 탐닉했는데, 이 와인이 화근이었다는 점을 찾아낸 것입니다.
왕들이 푹 빠져 마시다가 연거푸 죽음에 이른 술, 뭔가 금단의 열매 냄새가 나시나요? 레치나는 사실 이들 이전부터 악명이 자자한 술이었습니다. 10세기와 11세기에 거쳐 생성된 많은 기록에서 레치나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을 쉽기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음료는 정확히 무엇이었고, 그 평판이 그렇게 나쁘다면 왜 지난 2000년 동안 꾸준히 생산돼온 것일까요?
결국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앞서 소개한 에릭 왕과 시구르드 왕은 수지가 과도하게 들어간 레치나를 즐겨마시다가 몸의 일부분이 경화되거나 아예 막혀버려서, 혹은 중독으로 죽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리스인들은 와인에 수지를 첨가한 것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쉽게 부패하는 와인의 보존과 숙성을 위한 고대인들의 궁여지책이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이 와인을 숙성하기 위한 밀폐 용기를 개발하기 전까지 고대 그리스인들은 화이트 와인을 자신들의 용기인 암포라에 담아 숙성시켰습니다만, 그들도 와인이 공기와 접촉할수록 쉽게 상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인은 송진을 사용해 용기를 밀봉 했는데요. 이런 선택이 예상하지 못한 효과를 불러옵니다. 송진이 용기를 밀폐해 와인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한 것 뿐만 아니라, 와인에 송진이 배어 독특한 향과 맛이 나게된 것 입니다.
참고로 이렇게 만드는 레치나는 1세기 경 인물인 대(大)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의 저서에도 등장할 만큼 고대부터 사용된 와인 양조 방법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저명한 농업가인 콜루메라(Columella)의 저서 ‘De Re Rustica(On Rustic Life)’에도 레치나에 쓰이는 다양한 수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마시다보면 묘하게 적응되고 정말 가끔은 당기기도 합니다. 잘 숙성된 고급 리슬링에서 나타나는 휘발유 뉘앙스(페트롤·petrol)와 같이 묘한 중독성이 있는 맛과 향 입니다. 아마 에릭1세와 시구르드왕도 이런 묘함에 끌렸던 것 아닐까요.
아무튼 일견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 레치나는 그 강렬한 향과 맛, 에릭 왕과 시구르드 왕의 이야기 때문에 중세 이후 오랜 기간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합니다. 새 와인에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이나 와인을 깊이 탐구하는 사람이 호기심에 한두번 마셔보는 정도, 그리스 현지 농가에서 일종의 지역 전통주 정도로 소비되는 수준이었죠.
특히 질 낮고 묵은 와인에 부족한 날카롭고 상큼한 맛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그리스에 가면 레치나 와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유행할 정도로 이미지에 타격을 입기도 했습니다.
오래 되고 산화된 송진 대신 알레포의 건강한 소나무에서 갓 수확한 신선한 송진을 사용하고, 사용량도 최종 제품의 0.15%~1% 수준으로 엄격하게 제약합니다. 사용 방식도 티백처럼 천에 넣어 우리는 등 섬세한 공정을 도입하는 추세입니다.
베이스가 되는 와인도 향이 뛰어나고 가볍고 상쾌한 사바티아노(Savatiano)나 로디티스(Roditis), 아시르티코(Assyrtiko)를 사용해 송진의 향과 기분 좋은 조화를 만들어내는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체계적인 상품화를 위한 표준화 작업인 셈입니다.
온 세상에 생동감이 넘치는 봄이 돌아왔습니다. 코끝을 간질이는 아지랑이와 함께 따사로운 햇살 아래 상쾌한 레치나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와인을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면 분명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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