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된 도난 신고, 범인은 바로 본인…음주와 알츠하이머

한겨레 2024. 3. 1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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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잃어버린 기억
독한 술에 필름 끊기고 기억상실
초기 ‘알츠하이머 치매’ 증상 보여
게티이미지뱅크

70살 영철(가명)씨는 정년퇴직 뒤 임대업을 하면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평생 은행원으로 일했고 지점장까지 역임하고 퇴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비상금으로 모아 놓은 돈이 모두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봐도 도저히 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이야기했지만 누구도 영철씨 돈에 손댄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철씨는 결국 경찰서에 도둑이 들어왔다고 도난 신고를 했고, 경찰이 찾아와 아파트 폐회로텔레비전(CCTV) 등을 모두 확인했지만 영철씨의 집에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건은 해결되지 못한 채 종결되었습니다.

영철씨는 또 도둑이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 현관과 거실에 시시티브이를 설치하고 보안을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자신이 쓰려고 은행에서 출금해 놓았던 현금이 또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의 보안시스템을 확인해 보았지만 침입자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영철씨의 신고로 경찰이 찾아와 집 안 구석구석을 모두 조사했는데 뜻밖에도 장롱 이불 속에서 숨겨둔 돈을 발견했습니다. 과거에 도둑이 들었다고 신고했던 금액도 이불 사이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영철씨는 도둑이 돈을 가져가지 않고 왜 자신의 장롱에 넣어 두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안방에도 시시티브이를 다시 설치한 뒤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몇 주 뒤 그는 장롱 속에 돈을 숨기는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화면 속에 나온 사람은 잠옷을 입은 자신이었지만 영철씨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도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술 마시면 더 심해지는

영철씨의 아내는 영철씨가 밤만 되면 집 밖을 배회하거나 집 안에서 돌아다니는 일이 부쩍 많아진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철씨는 그런 행동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밤에 항상 술을 마시고 자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음주량이 더 늘어나 한병 정도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잔 날에 그런 일이 더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영철씨는 자신이 평생 모은 돈을 누가 가져갈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자신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가족들이 함께 찾아보면 장롱만이 아니라 신발장, 부엌 찬장, 심지어는 벽걸이 시계 뒤에도 5만원권 돈다발이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여기저기 돈을 숨겨 두고도 계속해서 도둑맞았다고 주장하는 그가 걱정되어 영철씨를 데리고 인근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검사 결과, 영철씨는 돈에 대한 집착이 심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돈과 연관 지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돈을 몰래 훔치는 도둑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피해망상이었습니다. 망상 중 가장 흔한 피해망상이 있으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시달리고 있거나 속았다는 그릇된 신념을 갖게 됩니다. 인지기능 검사에서 그는 기억력의 저하를 나타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수용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뇌 자기공명영상(MRI)에서 양측 해마와 측두엽의 초기 위축이 나타났습니다. 초기 알츠하이머 치매로 진단되었습니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두뇌의 수많은 신경세포가 서서히 쇠퇴하면서 뇌 조직이 소실되고 뇌가 위축되는 질환입니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전체 치매의 50~60%를 차지합니다. 뇌의 혈액순환장애에 의한 혈관성 치매는 20~30%입니다. 나머지는 기타 원인에 의한 치매입니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초기에 우울증이나 피해망상 등 정신적 증상이 흔히 발생합니다. 기억력 저하보다 일상생활에 더 큰 문제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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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살 이후 피해망상, 치매 의심해야

영철씨는 매일 독주를 많이 마셨습니다. 높은 도수의 알코올은 해마의 기능을 떨어뜨려서 마치 필름이 끊긴 것과 같은 ‘전향성 기억상실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전향적 기억상실증은 대뇌의 해마 기능이 손상되어 새로 겪는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전향적 기억상실증이 오면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초기 알츠하이머 치매가 있는 사람이 여행 중에 자려고 술을 마시거나 수면제를 복용하고 나서 비행기나 열차 안에서 전향적 기억상실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평소에 안 하던 난폭한 행동을 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영철씨는 엠알아이를 보면서 자신의 뇌가 위축이 되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마시던 술을 이제는 마시지 않기로 했습니다. 불면증으로 습관처럼 복용하던 수면제 또한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알츠하이머 치매와 피해망상에 대해 약물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밤에 집 밖을 배회하거나 돈을 숨기는 행동이 사라졌습니다. 물건을 다른 곳에 놓고 도둑이 들었다고 말하는 증상도 없어졌습니다. 더는 경찰에 신고하는 일도 없어지고 집 안 곳곳에 설치해둔 시시티브이도 확인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기억력 저하가 오면 자신이 기억을 못해서 찾지 못한 물건을 누가 가져간 것으로 착각하는 일이 흔히 발생합니다. 치매 환자 중에서는 요양보호사가 자신의 물건을 훔쳐갔다고 해서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 치매 악화거나 약물의 부작용이 아닌지 전문가의 평가를 통해 면밀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족들이 자신의 재산을 가져갔다고 해서 가족 간에 법적인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억력이 떨어진 부분은 상상으로 채워서 확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작화증’이라고 합니다. 작화증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메우기 위하여 상상의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서 거짓말과는 달리 고의성은 없습니다. 가족 중에 60살 이후에 피해망상이 있거나 작화증이 있는 경우는 초기 알츠하이어 치매가 아닌지 확인하면 좋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를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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