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서해랑길을 가다… ①장군의 길

조영석 기자 2024. 3. 1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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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날이 풀리고 산하엔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습니다. 길 따라 강 따라 굽이굽이 얽힌 삶과 역사의 흔적을 헤아리며 걷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뉴스1>이 '서해랑길'을 따라 대한민국 유일의 '민속문화예술 특구'인 진도구간을 걸으며 길에 새겨진 역사, 문화, 풍광, 음식, 마을의 전통 등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신들메를 고쳐 매고 함께 떠나볼까요.

(진도=뉴스1) 조영석 기자 = "적과 내가 함께 소멸되길 바랐던 바다" 진도대교를 지나면 바로 구간의 들머리인 녹진 관광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진도대교 아래로 해남과 진도 사이 좁은 해협의 바닷물이 흐른다. '물 흐르는 소리가 바다가 우는 것 같다'는 울돌목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 12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을 수장시킨 명량대첩 현장이다.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 해남쪽에 바라본 울돌목 위로 진도대교와 진도타워가 보인다. 2024.3.15 뉴스1 ⓒ News1 조영석 기자

진도대교 초입, 우수영 관광지에 잠시 주차한 뒤 갯가로 내려서면 '우~~' 하는 울돌목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살은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울음으로 빠르게 소용돌이친다.

장군은 이곳 울돌목을 건곤일척의 전장으로 선택했다.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을 상대하면서 벽파진 앞의 넓은 해역은 '내가 죽기 좋은 바다'였고, 울돌목 협곡은 '적과 내가 함께 소멸될 수 있는 바다'라고 판단했다.

적은 '함께 죽는 바다'로 밀고 들어와 혼자 죽었다. 왜군에게 기울었던 전세가 전환점을 맞는 순간이었다.

장군이 명량대첩 하루 전, 불안에 떠는 장수들을 모아놓고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며 했던 독려는 기적 같은 현실이 됐다.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그날의 승전은 "천운이었다"며 공을 하늘로 돌렸다.

울돌목의 빗발치는 탄환 소리와 생즉사(生則死)로 싸우는 병사들의 외침을 뒤로 하고 녹진 관광단지에서 발길을 뗐다. 10여분쯤 가파르게 오르면 망금산 정상의 진도 타워를 만난다. 명량대첩을 기념해 세운 곳이다.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한 진도 사람들 망금산은 해발 106.5m로 그리 높지 않지만, 발아래로 울돌목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쌍둥이 사장교인 진도대교와 '울돌목' 위 공중을 가로지르는 명량 해상케이블카도 볼 수 있다. 다도해와 진도대교가 함께 빚어내는 풍경은 폐부의 낡은 공기를 밀어내기에 충분하다.

진도타워. 2024.3.15 뉴스1 ⓒ News1 조영석 기자

진도 타워의 '명량대첩 승전광장'엔 이 장군과 함께 싸우다 숨진 진도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임진왜란·정유재란 참전 진도 인물'의 벽이 있다. 인물마다 이름과 본관, 활약상이 서너 문장으로 간략히 기술돼 있다.

살기 위해 죽은 그들의 생을 살피기엔 역부족이지만 그 이름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이란 또 다른 이름이 됐다. '명량대첩 승전광장'에선 해마다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명량대첩 축제가 열린다.

길은 진도 타워에서 내리막 산길을 타고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피로 물들었다는 건너편 피섬을 바라보며 벽파진전첩비를 향해 한참을 간다.

3월 초순의 양지바른 산길엔 이른 봄꽃이 피어 길을 함께 간다. 전장 한복판에서, 또는 언저리에서 베이고 벤 목숨들의 이름 같은 개불알꽃이나 광대나물 꽃이 푸르고 또 붉다.

벽파마을. 2024.3.15 뉴스1 ⓒ News1 조영석 기자

산길을 내려서면 길은 명량대첩로를 따라 둔전리 습지 보호구역 탐방로와 둔전 방조제를 지난다. 습지 뻘밭에서 어슬렁거리던 게들이 인기척에 놀라 '게 눈 감추듯' 구멍으로 숨고, 게를 노리던 왜가리의 한 발도 뒤따라 뻘밭을 박차고 튀어 오른다.

"신에겐 아직도 12척의 배가…."

방조제 둑과 시멘트 포장도로를 걸으며 그 길이 그 길 같아 무료해질 때쯤 길모퉁이를 지나자 빨갛고 파란 페인트칠을 한 지붕들과 교회 첨탑이 예쁜 마을 하나가 예고 없이 눈에 들어온다. 벽파마을이다.

그런데 회칠을 한 건물 벽엔 '75년 각하 지원사업'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마을 창고일 테다. 퇴색되지 않은 검고 굵은 글씨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길 완강히 거부했다.

벽파마을 뒷동산으로 이어진 길, 너덜바위 언덕에 세워진 '충무공벽파진전첩비'가 벽파항을 내려 보며 우뚝 서 있다. 전첩비엔 '민족의 성웅 충무공의 가장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며 명량대첩을 이룬 장군의 위업을 새겼다.

벽파진접첩비. 국기게양대 너머로 왜군의 척후병이 벽파진을 염탐하다 이순신 장군에게 들켜 도망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감부도가 보인다. 2024.3.15 뉴스1 ⓒ News1 조영석 기자

벽파항은 장군이 해남 어란진을 떠나 진을 치고 16일간 머물며 명량해전의 전략을 구상했던 곳이다. "신에겐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는 유명한 장계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장군이 보성 열선루에서 쓴 뒤 거듭 강조한 두 번째 장계다.

또 벽파항 뒤, 전첩비 앞에 있는 벽파정은 육지에서 오는 관리와 사신을 맞던 곳으로서 장군이 가끔 배에서 내려 쉬었던 장소다.

삼별초가 넘던 고갯길에 진달래 한 송이

녹진 관광단지에서 시작하는 11㎞가량의 '명량대첩로'는 벽파항에서 막을 내리고 '삼별초 호국 역사 탐방길'이 새롭게 시작된다. 두 길은 삶의 길에서 죽음을 열고, 죽음의 길에서 삶을 열어야 했던, 물러설 수 없는 사람들이 걷는 막다른 길이 돼 하나로 흐른다.

벽파정. 2024.3.15 뉴스1 ⓒ News1 조영석 기자

벽파항은 754년 전인 1270년 배중손 장군을 중심으로 한 고려 삼별초군이 항몽의지를 1000여척 선단에 싣고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첫발을 디딘 곳이기도 하다.

길은 삼별초군이 처음 주둔했던 연동마을을 지나 내륙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을 넘어 용장성에 닿는다.

연동마을은 이야기 형식의 삼별초 역사가 벽화로 그려진 '삼별초 마을'이다. '삼별초 둘레길'이 조성돼 있고, 군지기미, 대투개제, 절골 등 삼별초와 연관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해마다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삼별초 용장성 입성 기념행사'를 연다.

집마다 대문 옆에 작은 놋쇠 종을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종을 치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노령인구가 많은 탓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어나서 치고, 잠자리에 들 때도 친다. 출타할 때도 치고, 이웃집을 방문할 때도 초인종처럼 종을 친다.

연동마을 삼별초 벽화. 2024.3.15 뉴스1 ⓒ News1 조영석 기자

연동마을에서 구간의 종점인 용장성으로 휘돌아가는 4㎞ 남짓의 산길은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 쏟아야 할 만큼 가풀막진다. 산길 비탈에 삼별초의 맺힌 한처럼 진달래 꽃잎이 하나둘 붉게 피어나고 있다.

고갯마루에 올라 거친 숨을 고르는데 멀리 발아래로 용장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용장성 해설가의 도움으로 택시를 불러 들머리인 녹진 관광단지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여행 팁 - 해남 땅끝에서 인천 강화를 잇는 109개 코스의 '서해랑길' 가운데 진도 구간은 6코스부터 12코스가 지난다. 첫 구간인 6코스는 녹진 관광단지에서 출발해 진도 타워- 벽파진전첩비- 연동마을- 용장성에 이르는 15.5㎞ 길이다. 체력에 따라 5~6시간 정도 소요된다. 가파른 산길과 포장·비포장 도로를 지나는 난이도 중상급의 길이다. 진도 타워를 지나면 가는 길에 마땅한 휴게시설이 없다. 간식이나 충분한 식수가 필요하다. 녹진 관광단지엔 무료 주차가 가능하다.

kanjoy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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