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가지에 새싹이 돋고…경이로울 4월의 숲 [ESC]

한겨레 2024. 3. 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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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나무의 생명력
나무는 기둥을 통째로 자르면 오히려 거대한 뿌리가 가진 힘으로 잘린 그루터기 옆에 새로운 가지들을 솟아 올린다.

미국 메릴랜드에서 두해를 보내는 동안 나는 이곳 숲의 4월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꽃이 많이 피거나 단풍이 넘실거리는 달도 아름답지만 연두색 새싹이 가득한 4월의 숲은 정말 경이롭다. 숲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주로 낙엽활엽수로 이루어져 사계절 변화가 뚜렷한데, 4월이 되면 조용하던 빈 가지에 한꺼번에 새싹이 돋아 사방천지 연둣빛이 가득하다. 숲을 걸으면 새싹만 있는 우주에 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4월에는 되도록 숲에서 지내려 했는데 올해는 숲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에 간다. 계획에 없던 방문이다.

다시 태어난 아버지

지난 1월 어느 날, 가족 간에 메시지를 주고받는 채팅방에 오빠가 메시지를 남겼다. ‘중환자실은 24시간 켜져 있으니 안대와 귀마개를 가져가는 게 좋겠다’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없이 덜렁 하나 남겨진 메시지를 보고 나는 오빠가 자기 환자에게 보내야 할 메시지를 잘못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틀 뒤 어머니와 통화를 하다가 혹여나 하는 생각에 “집에 아무 일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주저하던 어머니는 내가 직접 물어보니 “답을 해야 할 것 같다”면서 “이틀 뒤 아버지가 수술을 하게 됐다”고 얘기하셨다. 2월에 아버지가 간단한 수술을 받는 걸 알고 있던 터라 ‘그 수술이냐’ 다시 물었더니 그게 아닌 큰 수술이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셨다. 원래 계획한 간단한 수술을 위해 검사를 받던 중 아주 위급한 다른 병을 발견해 갑자기 수술을 받게 되셨다고. 어머니는 내가 한국에 당장 돌아와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내가 하고 있던 일도 있을 테니 아버지와 상의 끝에 내게 알리지 않기로 했노라 설명하셨다.

전화를 끊고 울고, 아버지의 병과 앞둔 수술의 위험도를 찾아봤다. 가족들이 내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것에 섭섭해 하고, 한국행 비행기 표를 찾아보고, 연구소에서 한국 가는 행정절차를 밟는 등 정신없는 밤을 보냈다. 다음날 영상통화에서 아버지는 한국에 올 필요가 없다고 거듭 얘기하셨다. 고민할 새도 없었다. 몇 시간 뒤면 한국시각으로 수술 날이었다. 긴 수술 시간 동안 나는 잠도 오지 않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어서 아버지는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거쳐 퇴원하셨다. 퇴원일은 정확히 아버지 생신날이었다. 퇴원하면서 아버지는 내게 ‘다시 태어났노라’는 메시지를 보내셨다.

이후 그동안 집중하지 못해 쌓여있던 일을 해나갔다. 사실 오랫동안 준비했던 논문 제출과 식물 세밀화 개인전이 겹쳐 바쁜 시기였다. 전시 설치가 끝나자마자 몸살이 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월이었다. 연구소에 있을 땐 매주 한두 번은 숲 속을 걸으며 식물을 관찰하겠다 다짐했는데 숲에 가지 않은 지 한 달도 더 지나있었다. 나는 휘몰아쳤던 시간을 잊어버리고자 터덜터덜 산책을 나섰다. 좋아하는 연둣빛 새싹은 아직이었지만 땅 위에 솟아난 아주 작은 꽃들이 봄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연구소 캠퍼스에는 오래되어 뼈대만 남은 건물이 하나 있다. 나는 그 옆에 있는 산책로를 골랐다. 나무 가득한 숲길과는 다르게 풀밭 위에 오두막과 녹슨 농기계가 있는 고즈넉한 곳이다. 무성한 풀밭에는 간혹 큰 나무들이 있고 그것들은 대개 크고 작은 가지가 부러져있다. 숲 속에도 부러진 나무가 있긴 하지만 그처럼 많이 상처를 입은 상태는 아니다. 풀밭 위에 덩그러니 있는 나무는 혼자서 비바람을 맞다 보니 더 큰 피해를 받는다. 그중 유난히 크게 부러진 나무가 있는데 나는 그 나무를 한참 쳐다보았다. 걸으며 잠시 잊었는데 나무를 보니 아버지가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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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죽이는 기술 ’거들링·프릴링’

아버지는 평생 수술을 받은 적도, 아픈 적도 거의 없어 건강을 자신하셨다. 아마 이번 수술은 아버지에게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나무를 크게 부러뜨린 저 바람처럼. 예전에 어떤 책에서 나무는 천천히 자라는 것처럼 죽을 때도 천천히 죽는다는 글을 읽었다. 나무는 쉽게 죽지 않는다. 오죽하면 나무를 죽이는 방법을 소개하는 글도 찾을 수 있다. 나무는 꽃·잎사귀·가지를 꺾어도 죽지 않는다. 완전히 나무를 죽이려면 조금은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중 거들링(Girdling) 또는 프릴링(Frilling)이라는 방법이 있다. 나무 기둥에서 살아있는 조직인 체관부, 형성층, 물관부까지 세겹의 조직을 제거하거나 흐름을 끊는 방법이다. 나무 기둥의 중심은 나무를 지지하는 단단하고 죽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겹의 살아있는 조직은 가장자리, 그러니까 나무껍질 가까이 분포한다. 그래서 바깥쪽에서 그 조직들을 링 모양으로 벗겨내거나(거들링) 흐름을 끊어(프릴링) 물과 양분이 위아래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몇해고 계속 기다리는 것이다. 나무가 서서히 죽을 때까지. 잔인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나무를 죽이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기둥을 통째로 자르면 오히려 거대한 뿌리가 가진 힘으로 그루터기 옆에 새로운 가지들을 마구 솟아 올린다. 나무는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연구소에서 본 부러진 나무가 올해 4월에도 어김없이 새싹을 틔워 올릴 걸 알고 있다. 부러지지 않고 겨우 남은 가지와 부러져 땅에 닿은 가지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단풍이 드는 걸 작년에 보았다. 누군가에겐 크게 변해버렸거나 다시 태어난 듯 보일지도 모르나 나무는 살아있고 묵묵히 전과 같이 살아가는 중이다. 생명체는 모두 어딘가 아프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지만 계속 살아간다. 큰 나무를 닮은 아버지는 이번에 처음으로 거센 바람을 만난 것 같다. 봄비가 오면 비를 맞고 날이 따뜻해지면 아무 일 없던 듯 또 싹을 틔울 준비를 하는 나무처럼 회복하시길 빈다. 시간이 지나 육체에 흔적은 남더라도 마음은 완전히 회복하길. 새로 태어났다는 아버지의 밝은 모습을 4월에 보게 되길 바란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스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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