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의견] 기자의 크기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2024. 3. 16.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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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소설 'GO'를 좋아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권투 교습 대목을 특히 좋아한다. 아들에게 팔을 뻗어 한 바퀴 돌게 한 뒤 아버지가 말한다. “지금 네 주먹이 그린 원의 크기가 대충 너란 인간의 크기다. 권투는 자신의 원을 제 주먹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서 무언가 빼앗아 오는 행위다.”

그 문장이 마음에 들어, 강의에 써먹는다. '너의 오감이 가닿는 원이 대충 너라는 기자의 크기다. 취재는 그 원을 제 신경과 근육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서 무언가 감각하는 행위고, 보도는 그렇게 감각한 것을 독자의 원에 밀어 넣는 행위다.' 타고난 육체적·물리적 원의 경계를 넘는다는 점에서 권투와 저널리즘은 닮았다. 다만, 남의 원에서 빼앗으면 권투이고, 남의 원을 채워주면 저널리즘이다. 그래서 기자 노릇이 힘들지만, 같은 이유로 기자는 멋있고 괜찮은 직업이다. 비유가 썩 마음에 들어 혼자 웃는다.

실없는 비유 따위 궁리하지 않고 오직 진지하게 연구만 하는 해외 언론학자들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지난 글에 저널리즘의 세 요소로 '현장 관찰·목격', '문서·데이터 분석', '인물 인터뷰'를 제시한 외국 학자를 소개했는데, 셋 중에서도 '관찰과 목격'이 가장 중요하다는 교과서와 연구서가 많다.

▲서울중앙지검 입구에 취재진이 설치한 포토라인. 기사와 무관한 사진입니다. ⓒ연합뉴스

1944년 발행된 미국 저널리즘 교과서는 기자의 필수 능력을 열거하면서 첫째로 “조심스레 관찰하고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라고 적었다. 1993년 발행된 다른 미국 교과서는 정보 수집 방법을 설명하면서 “좋은 기사는 관찰에서 시작한다. 좋은 보도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디테일을 관찰하고 수집한다”라고 적었다. 2000년 영국 옥스퍼드대가 발행한 교과서는 취재 방법의 첫째로 관찰을 꼽고, 그다음으로 인터뷰, 읽기, 분석하기를 소개했다. 2009년 미국 연구서는 취재 보도의 중핵을 형성하는 최상위 유형(the first tier)으로 “목격(witness)을 담지하는 취재”를 꼽았다.

그 바탕에는 데이비드 흄 이래 형성된 경험주의가 있다. 흄은 직접 관찰하여 감각한 것만이 진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봤다. 이는 과학 철학의 출발이자, 과학의 방법을 본뜬 저널리즘의 기본이다. 여기서 핵심은 '증거 능력'에 있다. 진실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직접 보는 것'에 있다.

물론 무당도 장군님을 보고, 지관도 혈을 본다. 과학이 보는 방법은 이들과 다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 다시 볼 수 있는 것, 각자 본 바를 비교할 수 있는 것, 잘못 봤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을 솎아내는 절차를 체계화했다. 저널리즘은 그 방법을 따라 공동체와 세계를 입증한다. 소셜미디어가 가고 인공지능이 새로 와도, 최고의 취재는 여전히 관찰과 목격에 있다. 직접 보아 진실을 확인하려는 독자를 대행하는 게 기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목격과 관찰을 담은 기사조차 독자에겐 '2차 정보'다. 독자 입장에선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기자가 봤다고 주장하는 것'을 기사에서 읽는다. 따라서 '네가 본 것을 내가 왜 믿어야 하는지' 설득할 장치를 꼭 갖춰야 한다.

첫째, 잘 감각해야 한다. 여기에 왕도는 없지만, 반복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 감각은 근육과 같다. 자꾸 쓰면 는다. 르포 취재를 자꾸 하면, 더듬이는 확실히 예민해진다. 둘째, 생생하게 보도해야 한다. 설명하지 말고, 시공간에 독자를 밀어 넣는다는 태도로 언어를 벼려야 한다. 셋째, 투명하게 보도해야 한다. 감각 과정을 소개하면서, 감각하지 못한 게 무엇인지도 적으면 좋다. 기자 감각의 한계를 적으면, 독자 감각의 생생함이 증대하는 오묘한 이치가 있다. 넷째, 감각의 문장을 늘리고, 판단의 문장을 줄여야 한다. 하나 봤다고 열을 가르치는 무당처럼 굴면, 독자의 생생한 감각은 휘발되어 버린다. 다섯째, 관찰과 목격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어느 해외 학자는 관찰의 유형을 '잠시 강하하기'(parachuting)와 '함께 머물기'(staying)로 구분했다. 홀연 갔다가 후다닥 떠나지 말고, 진득하니 머물러야 깊고 넓은 관찰이 가능하다.

특히 한국에서 관찰을 적용한 기사는 '오래된 미래'다. 새로울 게 없지만, 오랫동안 좋게 평가받을 장르다. 보도자료 기사, 한 사람 인터뷰 기사, 정당 기사, 서울 기사가 대부분이니, 독자가 닿을 수 없는 시공간이 일상, 지역, 해외에 무수히 많다. 세계는 넓고, 르포 아이템은 많다. 소설 'GO'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묻는다. “원 안에 가만히 있으면 안전하게 살 수 있다. 그래도 권투를 배우고 싶으냐.” 이를 바꿔 질문할 수 있다. 보도자료의 원 안에 가만히 있어도 월급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르포르타주를 해보고 싶은가. 그 멋진 일을 위해 원을 뚫고 나오고 싶은가.

※ 참고문헌
Godler, Y., & Reich, Z. (2017). Journalist evidence: Cross-verification as a constituent of mediated knowledge. Journalism, 18(5), 558-574.
Jones, A. S. (2009). Losing the news: The future of the news that feeds democracy.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Rich, C. (1993). Writing and reporting news: A coaching method. Belmont, CA: Thomson & Wadsworth.
Scanlan, C. (2000). Reporting and writing: Basics for the 21st centu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Warren, C. (1944). Modern news reporting. Madison: Harper & Br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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