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론 세계 최고의료 무너져... 정부, 전공의와 직접 대화 나서야"
"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이 한 번에 무너지게 생겼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전공의 이탈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는 전공의 복귀를 위한 각종 압박책을 내놓고 있지만, 반응이 없다. 정진행 서울대 의대 병리학교실 교수(분당서울대병원)는 코메디닷컴과의 인터뷰에서 60년 간 복잡하게 얽힌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정부가 무리한 방법으로 조급하게 풀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호소했다.
서울대 의대 교수협의회 전 비대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정부가 쏟아낸 일방적 정책들 탓에 전공의들이 거의 다 대형병원 수련체계를 떠났다"면서 "4년의 시간을 쏟은 뒤에 본인에게 남겨지는 게 없는데, 병원에 머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전공의들은 항의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포기하고 병원을 떠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이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전공의 집단의 노동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이 이탈하면 미래도 흔들린다. 정부가 이번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미래 의료를 책임지는 전공의들과 직접적인 대화와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세계 최고 의료 무너지나... "막힌 곳 안 뚫고 물만 붓나"
한국 의료 기술과 병원들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최근 뉴스위크는 세계최고 병원 250곳을 선정했다. 우리나라 병원 중 18곳이 이름을 올리면서 일본과 함께 세계 최고 병원이 많은 나라 3위를 차지했다. 암 치료 생존도 세계 상위권 수준이며, 심장 수술과 폐 수술 등에서도 높은 의료 기술을 자랑한다. 한국 의료 기술이 상위 수준이라는 지표는 이밖에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정 교수는 수십 년 간 이어진 전공의들의 값싼 노동력은 우리나라 의료체계와 성장을 떠받쳐온 기둥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의료보험 제도 내에서 의료는 싸고 질이 좋다.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의료비를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수가, 그러니까 정부가 특정 진료에 대해 병원이 받을 수 있게 지정한 가격은 원가보다 오히려 낮다. 예를 들어 의료보험을 적용하면 100만 원이 드는 수술을 해도 병원이 받을 수 있는 돈은 80만 원 정도인 셈이다. 결국 하면 할수록 적자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병원들이 수익을 내고 발전할 수 있도록 지탱한 기둥 중 하나가 낮은 임금의 전공의(수련의) 인력이다. 만약 이들 인력비까지 제대로 쳐줬다면 대형병원들이 이렇게까지 수익을 내면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대형병원의 전공의 수련 시스템은 이미 이번 의료대란 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과거에는 의대를 졸업하면 거의 대부분 수련 과정을 거쳤지만, 이제 의대를 마치고 수련을 위해 병원에 들어가는 이들의 비율이 80%까지 떨어졌다. 지역병원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소위 필수의료과에서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정부가 꺼내든 카드가 의대 2000명 증원이다.
정 교수는 "그렇지 않아도 수련시스템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2000명 의대증원을 비롯한 필수의료 대책을 통보했다. 의료시스템에서 '필수의료'라는 관이 막혔는데 거기를 뚫을 생각은 안 하고 물만 들이붓는 셈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의대 2000명 증원은 현재 전공의들에게 어떤 타격을 줄까?
정 교수는 "젊은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필수의료를 배우기 위해, 예를 들자면 힘든 심장 수술, 암 수술, 뇌혈관 수술을 배우기 위해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입한 뒤에 마주할 미래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해지는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의대 정원이 갑자기 매년 2000명씩 늘어나 싼 인력들이 공급될 경우, 병원들이 값비싼 교수나 전문의 자리를 오히려 줄이면 줄였지 늘이지는 않을 것으로 전공의들은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으로 지원한다고 치자. 당장 다음 해 2000명이 늘어난다. 그리고 다음 해에 또다시 2000명이 들어온다. 대형병원들 입장에서야 값싼 임금 인력들이 쑥쑥 공급되니 좋다. 기존 전공의들 입장에선? 설 자리가 좁아진다. 이렇게 저임금 인력들이 넘치는데 어느 병원이 3배 임금을 주고 수련체계를 제대로 마친 전문의를 채용하겠나? 이런 미래를 전공의들이 눈치챈 것이다. 4년 뒤면 미래가 훨씬 불안정해지는데, 누가, 왜 4년을 허비하나? 누구라도 병원을 나오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의사 수가 늘어나면 개원가 경쟁도 치열해질 텐데 하루라도 빨리 자리잡는 게 지금 전공의 입장에서는 현명한 선택이다. 심장수술하는 법을 알아도 어차피 일자리는 개원과 미용밖에 없는데, 누가 병원으로 돌아갈까?
"구체적 재정 계획 없인 아무 것도 안돼...정부는 '예산' 들고 와서 정책 설명해야"
정 교수는 이번 사태의 핵심은 '돈'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병원 내 전문의 고용 증가, 교수 증가, 필수의료 지원 확충 등을 이야기하는 데, 이 모든 정책에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장 서울대병원은 45% 이상이 전공의다. 이 인력을 모두 3배 이상 임금 차이가 나는 전문의로 대체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투입된다. 필수의료 진료지원을 확충한다고 하는 데 여기에도 돈이 든다. 이 모든 돈 다 어디서 확충할 것인가? 정부는 현실성이 없는 정책들을 내놓으면서 '돈'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 정책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다시 말해, 돈은 결국 건강보험재정에서 나와야 하는데, 보험료 인상 등 재원 마련 이야기는 쏙 빠진 채 여러 정책만을 늘어놓아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전공의 이탈에 따른 비상진료체계 대응을 위해 최근 정부가 쏟는 돈은 월 3167억원 규모다. 1200억 원의 예비비 편성과 함께 1882억 원의 건강보험 재정도 활용한다고 밝혔다. 임시적으로 투입되는 규모지만 비상상황이 계속될 경우 후속 조치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정 교수는 지역거점병원을 빅5 수준으로 키운다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현실성 없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보건복지부가 이미 대형병원들이 수도권에 6600병상을 늘이는 것을 승인했다. 이미 수도권으로 더욱 병원과 환자가 몰리게 해놓고 무슨 돈과 자원으로 지역거점국립대 병원을 살리겠다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정 교수는 "10년 뒤 필수의료 인력 늘린다고 지금 현재 의료현장이 아수라장이 됐으며, 이미 한국의 미래 의료를 책임져야 하는 한국 의료인력들의 국외 탈출이 가속화하고 있다. 통계를 보면 미국 내 한국 출신 30대 의사들의 비중이 늘고 있다. 이른바 '브레인 엑소더스'가 시작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사태를 초래한 정부는 당장 미래 의료를 책임지는 전공의들과 직접 협상하는 것이 맞다"면서 "전공의들을 대표로 인정하면 된다"고 제안했다. 이어 "전공의들은 윗선배나 교수들이 설득한다고 돌아오지 않는다. 정부가 적절한 제안을 직접 내놓지 않는 한 정부 정책과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고 범죄자로 몰고, 사표를 내는 자유까지 박탈당한 전공의들이 돌아오기는 힘들어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1971년 전국적으로 번진 수련의 파동 사태 당시에도 처우 개선이 문제가 됐었고,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직접 서울대 병원에 와서 레지던트들한테 타협안을 내밀었다. 지금 정부도 직접 전공의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과 협상하는 것이 가장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은숙 기자 (yes960219@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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