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가사도우미 덜 주려고 내국인 최저임금도 낮추자고요?
지난 12일 한국은행 앞,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참여연대 등 노동조합 및 시민단체 13곳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한국은행이 돌봄 서비스에 대해 '차별적이고 반인권적인 발상'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 "심각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고 있는 돌봄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돌봄 노동을 저생산 노동으로 낙인찍었다"고 했습니다.
다음날에는 이주노동자평등연대와 공공운수노조 서울시사회서비스원지부 등 다른 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역시 한국은행 앞에서 집회를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한국은행이 '노동개악'에 앞장섰다고 성토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의 돌봄 노동 책무를 개별 가정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주요 역할은 통화량을 조절하고 외환보유액을 관리하며, 국제금융기구와 협력하는 일입니다.
즉, 그동안 시민단체와 대립각을 세울 분야가 딱히 없었기 때문에 이들 노동·시민단체가 연이틀 이곳 앞에서 기자회견을 벌인 건 이례적입니다.
이들이 항의하고 있는 한국은행의 '반인권적 발상'은 무엇일까요?
한국은행은 지난 5일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 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보고서는 간병·육아 돌봄서비스 부문의 인력난으로 인해, 그 비용이 일반 가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현실을 짚었습니다. 전일제 맞벌이 부부가 최소 하루 10시간 이상 가사·육아 도우미를 고용하면 2023년 기준 월 264만 원을 지출해야 한다는 분석입니다.
월 264만 원은 30대 가구 중위소득(509만 원)의 51.8%를 차지하는 금액입니다. 즉,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육아 돌봄에 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보고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 도입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을 위한 두 가지 검토방안을 제시합니다.
▶ 1) 개별 가구, 사적 계약 방식으로 외국인 직접 고용
현행법상 '가사 근로자'가 사업자와 고용계약을 체결하면 근로자는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가정이 '가사 근로자'와 '개인 대 개인'으로 계약하면 '가사 근로자는' 근로관례 법령의 적용 대상에서 빠집니다.
국가가 일일이 개인들의 계약에 개입하기 어렵고, '가사 근로자'의 법적 지위 또한 근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 사업자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있기 때문인데, 이 점을 정확히 파고든 겁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방식은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를 먼저 도입한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에서 시행 중이며, 해당 국가의 가사도우미 시간당 평균 임금은 각각 2,800원, 1,700원, 2,500원으로 한국의 내국인 가사도우미(1만 1,400원)의 15~24% 수준입니다. 다만, 사용인이 가사도우미의 식사와 주거, 의료비, 항공료 등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 2) 가사 도우미로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고용허가제에 돌봄서비스를 포함하고, 내국인과 외국인 구분 없이 돌봄서비스 종사자들에게 최저임금보다 낮은 급여를 적용
쉽게 말해 외국인에게 최저임금 이하 급여를 주기 위해 내국인의 가사 근로자의 최저임금도 낮추자는 취지입니다.
한국은 국제노동기구, ILO 가입국으로 내국인과 외국인의 임금 차별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두 방법 모두 ILO와 국내법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꼼수'로 보입니다.
시민단체들이 연이틀 한국은행 앞에서 집회와 기자회견을 벌인 이유입니다.
한국은행이 분석한 최소 10시간 기준, 가사·육아 도우미의 고용 비용은 264만 원입니다.
제가 궁금했던 건 이겁니다.
현재보다 최저임금을 낮추면 내국인 가사 근로자들 또한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을 텐데, 이들이 과연 기존과 같은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또 보고서를 작성할 때 이런 근로자들의 상황에 대한 고려가 있었는지 여부였습니다.
보고서 작성자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한국은행 보고서 작성자] "저희는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이는 분명히 발생하기 때문에, 내국인 피해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거라고 예상을 하는 거고. 또 혹시나 발생하는 피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정책을 시행하면서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피해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정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한 것이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도 질문했습니다.
[한국은행 보고서 작성자] "사실 저희가 정책을 시행하는 그런 입장은 아니잖아요. '정부 지원으로 받으면 됩니다'라고 (보고서를) 끝내버리면 사실 뭔가 논의가 진행되는데 저희가 기여하는 바가 좀 적잖아요."
또 보고서는 작성자는 '보고서가 개인의 견해일 뿐이고, 한국은행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난 5일 한국은행과 KDI(한국개발연구원)가 공동으로 노동시장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노동시장의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구조개혁 방안으로 보고서 3편이 소개됐는데, 논란이 된 돌봄 보고서가 이날 세미나의 첫 번째 발표 주제였습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세미나 환영사를 통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창용 / 한국은행 총재] "오늘 발표될 3편은 논문은, 우리 경제가 당면한 중요한 주요 내용을 다루고 모두 구조개혁이 시급한 과제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략) 이번 세미나가 노동시장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조개혁 달성하기 위해서는 알을 깨는 고통이 필요하다는 각오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나가는 출발점이 되길 기대합니다."
한국은행 세미나에서 발표도 되고, 한은 총재가 나서 언급 할 정도인 것을 보면, 논란이 된 후 '개인 생각'이라며 한국은행과 선을 긋는 작성자의 입장은 납득하기 쉽지 않습니다.
서울시의 시범 정책으로 올해 필리핀 가사도우미 100명이 입국할 예정입니다. 이들에겐 일단 최저임금이 지급될 전망입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재작년 국무회의에서 외국인 가사도우미 필요성을 처음 보고한 이후, "이들의 임금이 100만 원 정도 되면 정책 효과가 좋겠다"며 임금 차등 지급 취지의 주장을 했지만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지난 '세계여성의 날', 여성단체가 오 시장을 '성평등 걸림돌' 인사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시는 이번 시범사업을 앞으로 6개월 동안 진행하고, 본 사업 때는 그 규모와 최저임금 적용 여부 등을 다시 결정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한국은행-KDI 세미나'에서 돌봄 보고서 발표 후, 토론자들은 이런 의견을 냈습니다.
[김현철 / 홍콩 과학기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이미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고 있는 홍콩의 경우, 외국인 가사도우미는 반드시 전일제로 근무하게 강제함. 그 결과 내국인은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며 시간당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음.
[권정현 / KDI 연구위원] 돌봄 분야는 내국인과 외국인 간 대체 가능성이 높을 것 판단. 내국인 인력이 쫓겨나가는 정도가 클 것. 때문에 내국인 인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선행될 필요 있음.
인력난과 돌봄 비용 부담으로 외국인 근로자를 도입한다면, 그 선결 조건은 내국인 근로자 보호를 위한 안전장치가 아닐까요.
이문현 기자(lmh@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2024/society/article/6580448_364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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