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끝은 ‘호라이즌’이다… 정말 수평선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강동삼의 벅차오름]
# 바닷가 아득히 먼곳을 응시하는 작품처럼… 제주 풍경의 끝엔 수평선이 있다
그는 바닷가 어느 카페에 앉아 있다. 그 카페 옥상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수평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득히 먼곳’을 바라만 봤다. 9년째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남자, 9년째 석양을 바라보는 남자, 그 바닷가에 마치 삶의 흔적인양 발자국을 남기는 남자, 폭풍에 휘청이는 마른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남자, 스산한 제주 바닷가 어느 박공지붕의 창고같은 집(작가는 종착점 혹은 안식처라고 생각한다)을 늘 종착지라고 여기는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취재차 제주시 구도심에 나갔다가 우연히 장준원(53)작가의 개인전 ‘호라이즌’(돌담갤러리)을 만났다. 그의 작품 속엔 파랗고 붉은, 혹은 핑크빛 노을들이 나온다. 색감은 화려하지만, 우울하고 황량한 지평선 혹은 수평선이 가득하다. 빗소리에 지평선이 꿈틀거리는 듯 하다. 수평선이 춤을 추는 듯 하다. 작가의 동생 진원씨의 작품소개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번뇌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지평선을 바라보며 그 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지 모른다. 정말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왜 ‘호라이즌’을 그리게 됐는지 궁금해 지난 14일 전화했더니 장 작가는 “갤러리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며 작품을 철거하면서 무심한 듯 말을 꺼냈다. “자포자기는 아니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그 순간, 바닷가 수평선이 내게로 다·가·와·줬·다”고 말했다. 마치 당신이 쥐고 있는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새로운 걸 잡을 수 있다는 신호가 온 것처럼.
#머무는 곳이 작품이 되고 그림이 되는 곳…제주의 발길 끝은 갤러리가 있다
제주는 발길 닿는 곳이 갤러리다. 모든 풍경이 하나의 그림이고 하나의 작품이다. 가는 곳이 명작이 되고 머무는 곳이 그림이 된다. 가끔 갤러리 안에서 바라보는 밖이 더 걸작이다. 저지문화예술마을은 더더욱 그렇다. 마을 산책은 갤러리 산책이다. 사람들이 김창열, 김흥수화백, 유동룡(이타미 준), 박서보 등 유명작가의 작품에 홀릴 때, 그 작품들은 제주 풍경 속으로 침잠하는 듯 하다. 어느 날엔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마저 작품처럼 빛났다.
오지 중의 오지였던 중산간 해발 120m에 자리잡은 한경면 저지리는 2007년 9월 제주현대미술관이 마을 한복판에 개관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입주 예술인 갤러리만 15곳이 넘는다. 영어교육도시와도 멀지 않아 우스갯소리지만, ‘뉴저지’라고 불릴만큼 몸값도 올랐다.
그렇다고 갤러리마을 저지에는 예술인만 살지 않는다. 이 문화예술인마을 남서쪽엔 저지리 토박이들이 사는 키작은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조화롭다.
#아름다운 숲 대상을 받은 곳… 260계단 아래 분화구가 있는 곳 저지오름
무엇보다 저지리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저지오름(한경면 저지리 산 51번지)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해발고도 239m, 오름둘레 1550m, 분화구 둘레 900m, 분화구 깊이 62m인 화산체로 한라산의 장엄한 산세가 지붕처럼 다가오는 한경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오름이다.
정상에 깔때기 형태를 띤 원형의 분화구를 갖고 있는 오름으로 닥모루 또는 새오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예부터 저지오름은 초가집을 덮을 때 사용했던 새(띠)를 생산하던 곳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의 힘으로 나무를 심어 오늘의 울창한 숲을 만들었다. 그리고 2005년 6월 ‘생명의 숲’으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07년엔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받기도 했다.
식물들도 다양하다. 해송에서 부터 삼나무, 팽나무, 쥐똥나무, 생달나무까지 70과 220여종에 2만여그루가 서식한다. 휘파람새, 직박구리 등 제주 텃새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며 긴꼬리딱새나 팔색조 등 희귀철새의 번식지와 월동지이기도 하다. 제주 도룡뇽이나 쇠살모사 등 제주 대부분의 양서 파충류가 서식한단다. 물론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오름입구에 있는 저지오름 보전관리정보센터에서 이를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오름 둘레길 흙은 부드럽고 솔잎으로 폭신폭신한 길이 되어 걷기가 좋다. 더욱이 겨울보다 여름에 산책하기 좋은 오름이다. 둘레길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태양을 가려주고 솔향이 그윽하기 때문이다. 정상도 금세 오른다. 약간의 계단을 10분여만 참으면 정상에 가까워지는 걸 느낀다. 무엇보다 정상에선 움푹 패인 분화구가 반긴다.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야 하나” 하고 한참을 망설이지만, 호기심은 그 가파른 계단을 기어코 내려가게 만든다.
정자에서 망설이는 나를 본 산불감시원이 초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철 지난 팝송을 듣다가 내려가 보라고 자꾸만 재촉하듯 거든다. “다녀와요. 계단이 딱 260개 밖에 안되거든요.”라며 미소짓는다. 벼랑끝 계단을 보니 썩 내키지 않았지만 속는 셈 치고 내려간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화구 앞 데크에서 한참을 멍 때린다.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드는, 그런 풍광이다. 산굼부리나 아부오름, 성산일출봉 같은 분화구를 상상하면 오산이다. 내려가면 잡풀만 무성하다. 과거 수십년 전 분화구 밑에서 마을 사람들이 유채, 보리, 감자 등과 같은 작물을 재배했다는 말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분화구에선 잠시 나도 모르게 머뭇거려진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갈 생각을 하니 좀더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겹고 힘든 오르막이 될까봐 산불감시 아저씨 말이 맞는 지 정말 계단을 세기 시작했다. 가파른 ‘천국의 계단’(?)을 힘들이지 않고 오르는 방법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천국의 계단 끝은 정말 260번째 계단이었다. 천국의 평상에 오래도록 달라붙어 있는 나를 산불감시원은 본체만체 했다.
저지오름을 오르면 날씨가 좋은 날은 멀리 비양도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아주 먼 수평선이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이날은 날씨가 우중충해서 선명한 호라이즌을 만나볼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저 구름 너머엔 태양이 떠 있을 것이다. 바람과 함께 봄비가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 곶자왈 백서향기 따라… 저지오름과 저지곶자왈, 환경부 선정 첫 이달의 생태관광지로
‘아득히 먼곳(나의 아저씨 OST·구창모 작곡)’ 노래가사처럼 ‘찬바람 비껴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온 것도’ 아닌데, ‘먹구름 흐트러져 휘도는 곳에 미련을 두고 온 것도’ 아닌데 지평선이 아른거리고 수평선이 아른거렸다. 정말 장 작가의 그림처럼 제주는 어딜 가도 호라이즌을 만난다는 사실에 놀랍다. 아마도 서울처럼 높은 빌딩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수평선 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곳이 제주, 섬이다. 그리고 그 섬의 오름에 오르면 아련한 선 끝이 아득히 멀리서 펼쳐진다. 어쩌면 오름에 오르는 이유는 호라이즌을 만나는 벅찬 감동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이달 초에는 ‘저지곶자왈과 저지오름’이 환경부가 선정한 첫 ‘이달의 생태관광지’로 뽑히기도 해 또 한번 주목받았다. 연합뉴스의 KOSS(이메일명)기자는 저지오름에 가게 되면 꼭 저지곶자왈에 들러 볼것을 강추했다. 향기가 천리 만리까지 간다는, 봄의 전령사인 백서향군락지를 볼 수 있단다.
그의 말 한마디에 또한번 저지리를 들렀지만 백서향축제가 열렸던 저지리 마을 영상스튜디오 앞 곶자왈에선 백서향을 만나볼 수 없었다. 길을 찾는 지역주민이 지금은 그곳에선 만날 수 없단다. 문도지오름쪽으로 가야한단다. 저지리에서 오설록쪽으로 가다 보면 명이동못 안쪽 문도지 오름으로 들어가서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보물찾기’다. 배들이 전시된 진박물관 안으로 쑥 들어가면 백서향이 솔솔 풍겨온다. 곶자왈 안쪽에서 하얀 꽃들이 별사탕처럼,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꽃말처럼 ‘꿈속의 사랑’을 만나는 느낌이다. 이제 뭔가 알 듯 모를 듯 하다.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이….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엄마의 정원 ‘방림원’
어릴 적 엄마의 꽃밭을 그리며 만든 식물원인 방림원(성인 8000원)은 부부가 함께 노년을 즐길 조그만 정원 정도로 시작한 곳으로 알려졌다.
국내 최초 세계야생화박물관으로 자부하는 방한숙 원장의 식물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40년간 한국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3000여종이 다양한 야생화들을 수집하게 되었고 또한 손수 만든 분재들이 박람회 및 전시회에 참가해 호평을 받으면서 부부만 즐길 것이 아니라, 지치고 힘들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어 모두에게 문을 열었단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위적인 꾸밈 속에 꾸밈없는 야생화가 자라고 있기 때문일까. 꾸미지 않는 듯 자연스런 산책로와 정원 산책은 예상외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특히 기초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된 방림굴인 미니동굴은 백미다. 이 동굴을 이루고 있는 송이석은 항균 살균 탈취작용을 하며 천연 음이온이 발생한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모은 개구리 전시 공간과 그 옆에 세계 각국의 지폐를 전시해 놓은 공간은 또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방림원이란 이름은 단순하게도 원장 방한숙과 부군인 임도수의 성을 딴 방림자에 동산원자를 합하여 지은 이름이란다.
2002년 제주에 내려와 방림원 착공 후 온 힘을 다해 작업할 때 한여름 뙤약볕에 지치고 힘들어 연못가에 주저앉아 엉엉 목놓아 울때면 연못 속 개구리도 덩달아서 개굴개굴 울었단다. 그래서인지 발길 닿는 곳곳에 개구리 조각들이 눈에 밟혔다.
야생화 정원을 한바퀴 돌아나오는 길목에는 카페 고와리가 있다. 호젓하게 커피 맛을 즐길 수 있다. 방림굴에서 발효시킨 원료로 만든 마스크팩과 수제청, 손수 만든 청국장도 만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방림원 안주인이 팔순기념작품으로 선보인 봄 여름 가을 겨울 8폭 병풍이 기억에 남는다. 그 옆에 적어놓은 글귀와 함께.
‘꽃을 좋아하다 사랑하다 미쳐버린 내 인생 어느새 나이 팔십.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의 공간 속에서 겹겹이 쌓여있는 꽃들과의 이야기를 하나의 병풍 속에 그려보네. 작은 돌멩이로 산과 계곡을 그리고 식물로 색칠을 하며 내 지난 세월을 담아 보았네….’
저지리를 방문했다면 노부부 혹은 허니문 온 신혼부부나 연인끼리 한번쯤 들러볼만한 곳으로 강추하고 싶다.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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